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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김영하 전문가 실패기

*지난 학기 리포트. 

*장편을 모두 읽고 쓰려다 중간에 포기했다. 그렇게 김영하 전문가되기는 실패.



이케아 세대가 김영하를 소비하는 법

 

 

 

설문조사를 했다. 주변 지인 대여섯에게 ‘왜 김영하 소설이 섹시한 것 같으냐’고 물었다. 우선 대부분이 ‘김영하 소설이 섹시하다’는 전제에는 동의했다. 친구 S는 한참 생각하다 “홍상수 영화에 나오는 지질한 남성 캐릭터들이 전시하는 담배 찌든 내음의 지성(知性)이 김영하 소설에도 잘 구축돼 있다”라는 길고 어려운 대답을 했다. 미안하지만 동문서답이었다. A가 왜 B하냐는 물음에 C도 B한데 A가 C같아서라는 이상한 대답을 한 셈이었다.

 

후배 P는 S와 달리 망설이지 않고 “밤에 어울리는 작가다”라고 단박에 대답했다. 그리고 조금 모자랐다고 생각했는지 “좀 담담하게 무섭고 무섭게 담담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난항이었다. P의 대답도 S 만큼 마뜩찮았다. 저마다 김영하 소설의 매력을 어렴풋이 그러나 비교적 동질적으로 느끼고 있었지만 그 이유에 대해선 치밀하게 고려해볼 일이 없었다. 고민을 이어갔다. 애꿎게 내게 덜미를 잡힌 친구들도 함께 고민했다. 그러다 유일하게 남자 중 답장을 보내온 후배 Y가 역대 가장 간명한 답안을 내놓으며 물음에 마침표를 찍었다. “많이 자잖아.”

 

 

욕망의 나르시시즘, 보여주기의 글쓰기

 

 

“많이 자잖아.” 우리는 이 단출한 대답을 찾기 위해 갖가지 추상적인 언어들로 질문을 던져왔던 것이었다. “많이들 자”는 소설은 많다. 그렇지만 유독 김영하 소설 속 성애는 뇌리 속에 깊숙이 박힌다. 진득한 묘사인 때문도, 너무 ‘쿨’하게 발음해버리는 문체 때문도 있다.

 

김영하의 세계 속에는 낭만적 사랑의 신화가 버텨내지 못한다. 주인공들은 쾌락에 탐닉하고, 욕망에 순응한다. 외면적으로는 순하고 고고한 모습을 꾸며내더라도 그 시도는 오래 가지 못한다. 기만을 일삼던 주인공들이라도 끝내 투명하게 욕망에 복속된다. 친구 S가 말했던 ‘담배 찌든 내음’이나 후배 P가 말했던 ‘밤에 어울리는 작가’라는 말도 결국 김영하 소설들이 가리키는 욕망의 지점에서 분유한 것이다. 끝 모르는 욕망의 서사가 김영하의 펜촉에 가득하다. 오늘만 살고 말 것 같이 육체적 쾌락에 탐닉한 주인공들이 태반을 이뤘다. 주인공들은 쩐내 나는 욕망을 위해 폭주하고(『너의 목소리가 들려』), 투신하고(『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살인자의 기억법』). 근대문학이 이룩해 놓은 거대담론의 고고한 형식들을 김영하의 주인공들은 욕지거리를 던지며 조롱하고 파괴한다. 소소한 생활담이 던지는 파열이 배신을 더 선명하게, 죽음을 더 비참하게, 염세를 더 핍진하게, 섹스를 더 찐득하게 만든다. 김영하 소설의 뒷맛은 항상 욕망이었다.

 

김영하는 1968년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나 1980년부터 서울에 정착했다. 잠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경영학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95년 단편 「거울에 대한 명상」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4년 한 해만 『검은 꽃』으로 동인문학상, 『오빠가 돌아왔다』로 이산문학상, 「보물선」으로 황순원문학상을 받으면서 ‘문학계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2013년 「옥수수와 나」로 이상문학상도 수상했다. 7편의 장편소설과 4편의 소설집을 출간했고 산문 집필이나 번역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김영하는 마니아층이 두텁고 인세로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는 한국의 몇 되지 않은 ‘스타 작가’다.

 

90년대 후반 세기말적인 퇴폐주의로 김영하 소설을 해석하고 그의 글쓰기를 나르시시즘이라 일컫는 문단의 평가도 더러 있었다. ‘악마주의’라는 표현도 등장했다. 김영하의 인물들은 주변에 널려있는 감각적인 상황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면서 기존의 도덕이나 규범과 관계없이 살아간다. 자의식이 투철하다. 이 자의식의 원천은 욕망이다. 김영하의 주인공들은 욕망이라는 단 하나의 정언 명법을 따른다. 유난히 금기에 저항하는 욕망 본위의 인물들이 김영하 서사에 가득하다. 「피뢰침」은 벼락을 맞고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다. 죽을 고비를 넘긴 이들은 인간 접지를 자처하며 더 큰 자극을 찾아 나선다. 벼락을 맞을 때 느꼈던 흥분감과 하늘이 자신을 택했다는 일종의 선민사상과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더 큰 자극을 욕망하게 만들었다. 모임의 일행 중 하나가 드디어 천둥 번개가 치는 날에 한 번 더 ‘선택’되는 장면은 책장에서 스파크가 일 듯 생생하게 구현돼 있다. 강렬하고 찌릿한 문학적 기록을 남겨두는 일. 김영하의 필치에서 종래 기성 언론에서 보였던 ‘훈계조’를 찾아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욕망 본위의 서사에 가장 적합한 방식은 당위가 아니라 보여주기 식이다. 김영하의 활자들은 책장 위에 입체적으로 영상 문법을 직조한다. 영상은 보여줄 뿐이다.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는 「비상구」는 가장 김영하식으로 나르시시스트적인 인물들을 보여준다. 퍽치기 전력이 화려한 주인공은 노래방 도우미를 하는 여자 친구와 모텔방에서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낸다. 술과, 섹스와, 먹고 자는 일이 일상이다. 그들만의 의리와 정의를 세우고 대형 마트에서 물건을 훔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철저히 아웃사이더의 삶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매일은 처연하지도, 비관적이지도 않다. 파국으로 치닫더라도 그들은 그들 본위의 욕망을 따라 살 뿐이다.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섹스를 한다. 성욕에 의한 몸짓이기 보다는 권위에 대항하는 방식이다. 금기에 대한 저항은 어느덧 이들의 정체성을 이루게 되었다.

 

 

메시지 없는 욕망의 수평축

 

 

김영하의 소설을 금세 읽어버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욕망이 있는 곳엔 항상 이야기가 고이기 마련이다. 김영하는 욕망을 잘 활용할 줄 안다. 욕망의 실타래를 적절하게 풀고, 때로는 꼬아놓는다. 한 편의 삽화 같은 이야기들은 주인공들의 살아 숨 쉬는 욕망들을 전시하고 그것들을 재배치하려고 과도하게 시도하지 않는다. 이 윤리적 비어있음이 김영하 서사의 또 다른 특징이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사내는 어떻게 되었나」가 그 남자에 대해 말해주는 것은 없다. 그는 엘리베이터에 끼어 있는 상태를 주인공에게 발견 당했을 뿐이다. 자질구레한 기획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회사에 서둘러 가던 주인공은 표정도 알 수 없는 엘리베이터 사이의 불우한 남자를 ‘타율적으로’ 지나친다. 교통사고를 당하고 회사 엘리베이터에 그 자신도 끼이게 되는 불운을 연달아 겪으면서도 그를 이해해줄 사람은 없다. 하루 내내 아침에 본 형상이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지만 엘리베이터에 낀 사내를 그가 구해낼 수 있는 방법은 안타깝게도 전무하다. 그 자신의 존재 의미부터 투명하다. 비용과 에너지를 절감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그의 과제였다. 깎고, 깎여나가는 데서만 그의 존재감이 확인되었다. 직능을 마치고 드디어 주변에 눈을 돌릴 수 있게 될 때, 엘리베이터에 낀 사내는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우연히 주인공을 찾아온 불운은 찝찝한 불안감만을 남긴 채 종적 없이 ‘해소’되고 만다.

 

도덕과 연대를 말하기 쉬운 삽화에서도 김영하는 입을 꾹 다문다. 잘 작동되는 엘리베이터와 카프카 단편에서 으레 느꼈던 불안한 침묵만 감돈다. 비판과 처연함이라는 윤리의 조각들을 찾아가는 대신 사라져가는 ‘개인’의 초상을 홀연히 보여주었을 뿐이다. 불운과 마주한 존재감 없는 이들의 욕망마저도 사라져가는 삽화를 보여준다.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한 「보물선」에서도 마찬가지다. 김영하는 사소한 기인들의 삽화를 조명한다. 이순신 동상을 끌어내리려 보물선 작전에까지 가담하는 남자의 사소한 무협이 펼쳐진다.

 

혹자는 그렇기 때문에 빈틈이 많은 김영하의 서사가 그 형식과 내용의 깊이에 비해 과도한 찬사를 받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2013년 단편 「옥수수와 나」의 이상문학상 수상을 놓고도 인터넷 상에서 다양한 비난이 오르내리기도 했다. 지나치게 단출하고 허무맹랑한 서사라는 지적이었다. 남자는 소설을 쓴다. 전문 경영인 출신의 출판사 사장은 소설가의 다음 작품을 선매하고 고수입을 올려줄 것을 기대한다. 매판원으로 전락한 예술가는 충실하게 자기 욕망에 복무하며 소설을 쓴다. 섹스를 하거나, 소설을 쓴다. 사장의 전처까지 그 욕망의 구조 속으로 얽혀 들어가며 끝내 소설가는 청산가리인지 모를 약을 털어 넣고 자본가라는 닭에 쪼이는 옥수수가 돼버린다. SF적 공상과 인간의 욕망이 얽혀 버무려진 김영하의 가장 전통적인 문법을 따른 단편이었다.

 

다만 소설 초입에 나온 우화는 조금 색다른 것이었다. 탈무드 우화와 격언으로 기시감 효과를 계하는 코엔 형제의 영화를 떠올렸다. 에둘러 말했어도, 김영하 서사의 특징이었던 ‘빈틈’의 전통에서는 파격이었다. 지젝의 농담이었다. 한 정신병원에서 의사와 환자가 대화를 나눈다. 환자는 자신이 옥수수라는 망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항상 닭들이 자신을 쫓아오고 있다는 생각에 두려워한다. 그래서 의사는 환자에게 옥수수가 아니라고 타이르듯 말한다. 환자는 답한다. “저는 제가 옥수수가 아니라는 걸 알아요 선생님. 그런데 닭들은 모를 것 아니에요?”

 

지젝의 이 우화는 통상 내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던 믿음이야말로 근본적으로 외적인 것, 타자와의 접속을 통해서 구현되는 것, 실생활 속에 재현되는 것임을 말해준다. 지젝의 명제가 이 소설에 적용되는 곳은 ‘소설 쓰기’를 말할 때다. 출판사 사장으로 상징되는 거대한 닭=자본은 여기 너무나 충실하게 속박된 문화와 예술을 향유하고 독점한다. 아니 차라리 자본이야말로 문화의 태반, 문화의 자궁이다. 이럴 때 올바른 쓰기란, 그리고 올바른 예술이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소설가는 얼마나, 그리고 어느 정도 독립할 수 있는가.

 

김영하가 ‘꼰대’가 되는 순간은 이렇듯 ‘쓰기의 윤리’를 말할 때뿐이다. 이미 김영하에게 큰 명성을 안겨다 준 『아랑은 왜』는 김영하의 질박한 글쓰기담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첫 문장을 쓰는 방법과 정확한 어휘를 고르는 법, 플롯을 요리하고 배치하는 법에 대한 작가적 클리셰가 갖가지로 고백되었다. 추리소설의 형식을 빌렸지만 이는 김영하식 소설론이라 보아도 무방할 정도다. 김영하의 뻥 뚫린 서사에서는 쉽게 발견할 수 없었던 ‘된다’, ‘안 된다’는 발언이 비교적 명징하게 드러나 있다. 글쓰기에 대한 윤리는 그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자 가장 공정한 것이었기 때문일까. 폭주하는 욕망의 수평축에는 이렇듯 ‘쓰기’에 대한 윤리가 놓여있다.

 

금기를 넘나드는 김영하가 결론 내린 최대한의 저항방식은, 그리하여 소설가의 작업을 ‘윤리’의 범주 내로 포괄시킬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그럼에도 쓰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쓰는 것’이다. 사장의 전처와 격렬한 성행위를 하는 등 자본을 배반하는 이 모든 상징적 제반행위들을 단지 ‘쓰기’를 위한 수단으로 격하시키는 것, 그리고 감정적 최고조의 순간에서 미친듯이 써내려가고 이야기하고, 고민하고, 또 써내려가는 것. 그것이 영민한 이야기꾼이 ‘윤리’의 영역에서 ‘꼰대스러움’과 협력할 수 있는 이상적인 접점이었을지 모른다.

 

 

욕망 없는 이케아 세대가 김영하를 소비하는 법

 

 

달리 말한다면 김영하의 세계는 무궁무진하고 무한하다. 욕망으로 추동된 세계는 늙지 않는다. 그의 90년대의 젊은 감성을 대변했던 ‘젊은’ 작가는 이제 10년이 넘게 흘러 전집이 출간된 중견작가가 되었지만 여전히 김영하에게 ‘젊은’ 작가라는 수식이 어색하지 않은 이유다.

 

외양적으로는 세련됐지만 내구성은 부족한 이케아 가구를 빗대 현재의 20~30대를 흔히 ‘이케아 세대’라 일컫는다. 해외에서 수입된 문화적 토양을 가지고 있다는 점, 자가 발전(부품 조립)을 개인이 전적으로 떠안는다는 점, 가격 대비 효율성을 강조한다는 점 등을 빗댔다. 사상 최고의 스펙을 가졌지만 사상 최악의 취업난을 겪고 있는 구난 세대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소비 수준은 높지만 평생 정규직으로 살기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 힘든 세대다. 이런 시스템 하에서 수준 높은 욕망을 현실적으로 구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낭만적 사랑과 그 사랑의 결실을 결혼으로 맺는 사회적 관행이 뒤틀리고, 전통적인 안정적인 삶에 대한 욕망이 빗겨간다. 생존에 투여하기 위해 ‘정상’의 범주에서 탈주하고자 하는 개인들이 많아진다. 혼자 밥 먹고, 혼자 사는 데 익숙해진다. 큰 수준의 꿈과 희망은 사그라든다.

 

김영하는 90년대 매체 혁신으로 본격적으로 촉발된 대중문화의 세례를 상징하는 문인이기도 하다. 이른바 ‘통신 활동’은 그의 문학적 이력 중 어딜 가나 소개되는 큰 이력이다. 그가 다뤘던 ‘기인’들은 이제 ‘파격적’인 ‘젊은 감성’으로만 치부될 수는 없는 일이 되었다. 「바람이 분다」에서 등장했던 꿈도, 어떤 거창한 인생 설계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혼자 살아가는 청춘들이 그런 삶의 방식에 점차 익숙해지고 있다. 이것은 개인적인 무력감을 떠난 세대적인 무력감이다.

 

대중문화의 무비판적인 수용자들의 모습이 김영하에 투사됐다는 90년대의 해석과는 달리 이제 김영하의 소설은 욕망 없는 ‘이케아 세대’들에게 곧 느리고 격조 높은 감동을 느낄 여력이 없는 세대에게 여타 허다한 수식 없이 직접, 은폐된 욕망을 전시하는 김영하는 문학적 재현의 아이콘으로 ‘섹시’하게 다가오게 되었다. 특별한 훈계나 메시지 없이 자박자박 욕망에 대해 언급하는 ‘엘리트’ 작가의 이미지가 혼자 생활하는 수많은 나르시시트에게 ‘쿨’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 없는 이 세대에서도 김영하는 한동안 ‘쿨’한 작가로 젊은 작가의 명성을 이어나갈 가능성이 높다. 비관을 직접 말하지 않으면서도 욕망의 파괴적 충동에 대해 가장 적절하게 말하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욕망의 투사지로서, 자기 안의 은폐된 욕망의 전시지로서 김영하의 서사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옥수수’가 되었다고 많이 느낄 이 세대에게 계속 소비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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