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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칼럼

[세상 읽기] 거리의 정치와 포퓰리즘의 진실/김남국

*포퓰리즘을 '선동'으로 몰아가는 문법의 이면에 대한 칼럼

*포퓰리즘은 축복일수도 있다. 또는 대중과 유리된 정치 현실의 단면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포퓰리즘이 제도권 밖에 정체성을 두고 있다는 재밌는 책점. 그렇다면 여기서 '기존의 정치엘리트'라고 지칭하는 것은 결국....



대중영합주의로 번역되는 ‘포퓰리즘’은 자주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이 말은 절차와 제도를 무시하고 군중을 선동하면서 사회 안정을 위협하는 움직임을 가리킬 때 주로 쓰여 왔다. 요즘처럼 거리에 시민들이 모여들고 웅성거리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포퓰리즘의 위험을 경고하는 말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포퓰리즘은 정말 나쁜 것일까?

사실 대의민주주의와 포퓰리즘은 역사 속에서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존재해왔다. 포퓰리즘이 등장하는 시기는 선출된 대표가 시민들의 통제로부터 멀어져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한 집단으로 권력화할 때이다. 즉, 권력을 위임받은 선출된 대표들과 그 권력의 주인인 시민들 사이의 거리가 멀어졌을 때 그 틈을 뚫고 포퓰리즘이 등장하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다양한 포퓰리즘의 사례는 두 가지 공통된 특징을 보여준다. 첫째는 그 주장에서 내가 당신들의 권리를 기득권자들로부터 빼앗아 다시 찾아주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 방법에서 거대담론을 중심으로 하여 대중의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다. 결국 대의민주주의가 이름뿐인 상황에서 시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을 때 포퓰리스트적 지도자가 등장하고 기존의 정치엘리트들은 이러한 도전을 두려워하면서 ‘선동’이라는 부정적 낙인을 찍고자 애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제도화의 진전은 정치적 안정을 가져오지만 실제 작동과정에서 부패하고 관념화할 때 정당성을 잃게 된다. 따라서 시민들의 실망을 등에 업은 포퓰리스트적 도전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한국 현대사의 큰 변화들은 대부분 제도권 밖에서 시작되었다. 1960년 4월혁명, 1980년 광주항쟁, 1987년 6월항쟁, 2002년 인터넷혁명, 2004년 총선낙선운동, 2012년 안철수 현상 등은 제도 밖의 도전에 의해 제도권이 긴장하고 변화를 가져온 대표적인 경우들이다.

조직된 기득권 세력이 시민들로부터 멀어졌을 때 주기적으로 등장하는 포퓰리즘적 저항은 한국 정치의 축복이자 한계이다. 이런 흐름이 기존 제도권에 긴장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한국 정치의 축복이지만 포퓰리즘적 저항의 주체가 자신들의 주장을 제도화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하고 다시 포퓰리스트적 공격의 대상으로 전락해 왔다는 점에서 한계이다. 남미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포퓰리스트적 저항은 대체로 일반적인 쇠퇴의 길을 간다. 이 길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쉽게 잦아드는 바람으로서의 저항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조직을 결합시켜 사회에 변화를 추동하고 그 변화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결국 대의민주주의의 쇠퇴와 포퓰리즘적 저항의 긴장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지속 가능성에 가장 큰 과제는 시민들이 어떻게 선출된 대표를 통제하느냐, 그리고 시민들 사이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느냐이다. 전자의 대안은 참여민주주의이고, 후자의 해법은 국가개입을 통한 재분배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정치공동체의 의사결정에 시민들의 지속적인 참여와 감시가 필요하고 최적의 국가개입에 합의한 복지정책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가장 창조적이어야 할 정치조차도 안일하고 기계적인 매너리즘에 빠져들고 있다. 거리에 모여드는 시민들의 요구에 기존 제도와 법을 거론하며 겨우 포퓰리즘의 낙인으로 모면하려는 정치인들은 게으르다. 시민들이 그들과 느끼는 거리가 멀어질수록 선출된 대표를 감시하고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에 연대하는 포퓰리즘적 저항의 목소리는 커질 것이다. 한국 정치의 축복이자 한계의 순환이 다시 시작되지만 어이없는 퇴행이라는 점에서 우리 모두의 불행이다.

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