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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편지가 와르르르

수습 때 사다놓은 핸즈프리 블루투스를 찾아 이리저리 서랍을 뒤졌다. 이사온 지도 벌써 1년이 넘었지만 서랍정리는 엄두도 못 냈다. 기기가 있을 만한 서랍을 헤집어보니 작은 종이가방에 넣어 둔 편지 꾸러미가 나왔다. 대학시절 다정한 글씨로 꾹꾹 눌러 써내려간 편지와 엽서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지나간 추억은 왜 이렇게 다 귀여울까. 글씨마다 박제된 그때 그 사람들의 얼굴도 생각이 나고, 저마다 다른 개성이 뚝뚝 넘쳐흘러 슬몃 웃음이 난다. 하마터면 가슴이 서늘할 뻔했던 두터운 편지들도 하나하나 넘기며 미소가 지어지는 걸 보면 모든 편지들을 애써 버리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나는 많이 자랐구나. 위로가 돼 주어 고맙다는 수 년 전의 글씨들이 오늘 내 마음에 큰 위로. 어딘가 버리지 않은 편지들 틈에 있을 나의 글씨들도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으면. 


지나간 시간들에 익숙해졌다 생각할 나이인데도 아직 시간을 다루는 법엔 익숙지 못한 것 같다. 나는 퍽 비관론자라 사람이 바뀌는 것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 편지들이 쓰인 시점으로부터 지금까지의 내 몇 년은 그나마 조금이라도 원형이 바뀔 수 있을 정도로 많은 경험들이 응축된, 긴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편지지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진심이 느껴지는 정성어린 글씨와, 의례상 기념일을 챙기는 축하카드들, 여행지에서 파란 볼펜을 꾹꾹 눌러 써 담은 마음들. 똑같은 시간을 거쳐 온 이들에게 박제된 나는 지금의 나와 얼마나 다른 사람일까? 각양각색이겠지 아무래도. 


와르르 쏟아진 편지들 틈에서도 먹먹한 마음이 가장 컸던 건 어렵게 헤어진 전 남자친구가 일기처럼 두껍게 써 준 편지보다 오히려 마음을 주지 못해 미안했던 사람에게 받은 편지였다. 얼마나 꾹꾹 눌러담았을지,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다해 썼을지가 눈에 선했다. 나는 그때 어땠었지, 조금 더 다정할 걸, 조금 더 상냥할 걸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나 돌려 들었던 옛 노래를 다시 틀고, 아직도 내 곁에 많이 남아있는 옛 사람들의 글씨들을 마주하며, 편지가 와르르르 추억이 와르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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