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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칼럼

김명인 교수의 '여성혐오' 관련 포스트 발췌

한국남성들의 절대다수는 여성을 열등한 존재라고, 혹은 열등한 존재여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것은 비단 여성을 일상적으로 비하하거나 적대시하는 경우만이 아니다. 그 여성이 아무리 능력이 있고 많은 성취를 하고 심지어 명백히 자기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여성을 존중한다고 하는 경우건, 보호해야 한다고 하는 경우건, 매너가 좋은 경우건,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경우건 다 마찬가지다. 어느 경우건 한국남성에게 여성은 쉬운 존재이거나 쉬운 존재여야 한다.


10대에서 80대까지 연령과 세대에 관계없이 동성애자가 아닌 한국남성들의 절대다수는 많건 적건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있다. 특히 10대 후반에서 40대 전후의 ‘젊은 여성들’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그렇다. 그것은 말이 좋아 대상화이지 사실은 성적 착취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차별과 성적 대상화는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차별은 성적 착취를 낳고, 성적 착취구조는 차별을 고착시키는 역할을 한다. 아마도 한국사회는 이 양면구조를 통해 사회의 인간화와 민주화에 드는 비용을 효율적으로 절감해 온 전형적 사례 중의 하나라고 할 것이다.


한국남성들이 여성에 대하여 가지는 위의 두 가지 태도 혹은 인식은 유구하고 이젠 다양한 유무형의 제도로 고착되고 재생산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아졌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심상구조와 제도가 변화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교육과 인지의 발전과 더불어 여성들 스스로가 끝없이 이러한 심상구조와 제도에 대해 저항하고 문제를 제기해온 결과이다.


‘여성 혐오’란 단순한 증오나 배척의 심상이 아니라, 위와 같은 여성에 대한 차별화와 성적 대상화,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거나 그것에 의해 뒷받침되는 유형무형의 제도와 습속 전체가 여성에게 가하는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억압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국남성 일반은 개개인의 성향이나 입장과 상관없이 구조적으로 여성을 차별하고 착취하는 데에 동참하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 유형 무형의 이득을 얻고 있다, 따라서 ‘여성 혐오’는 ‘덜 떨어진’ 특정 남성집단의 정서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사회를 지탱하는 하나의 사회적 자산으로 그것은 모든 남성들에게 골고루 배당된 황금주가 되어 일상적 수익으로 환원되고 있는 것이다.


일베의 언어와 행동은 이러한 차별과 성적 착취의 구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낸 하나의 하위문화적 반영물에 지나지 않는다. 일베에 소속되어 있건 아니건 여성에 관한 한 한국남성의 절대다수는 개체적으로는 어린 시절부터, 계통적으로는 최소한 식민지 시대 이래로 사실상 일베의 정서를 유구하고 완강하게 공유하고 있다. 다만 일베는 그것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역할을 맡은 것 뿐이다.


메갈리아가 대상으로 하는 것은 일배만이 아니다. 메갈리아는 직접적으로 미러링을 통해 일베의 언어와 행태를 전도시키지만, 그것을 통해 전도되는 것은 일베만이 아니라 한국남성의 여성에 대한 태도와 인식이다. 한국남성들이 여성들을 차별하고 착취하기 위해 또는 그 과정에서 특수하게 공유해 온 언어세계를 과감하게 침범하고 그것을 탈영토화하여 백일하에 드러냄으로써 그 언어세계가, 그리고 그것의 배경에 완강하게 자리잡아온 차별과 착취의 심상과 제도 전체가 얼마나 낯설고 외설적이며 반윤리적이고 폭력적인 것인지 문득 깨닫게 해 준 것이다. 그것은 마치 겉으로는 정상적이고 미끈한 사람의 몸 안에서 거대한 기생충 덩어리를 갑자기 끄집어낸 것과도 같은 효과를 만들어 냈다. 그동안 모든 한국남성의 몸 안에는 성차별과 착취를 먹고 사는 큰빗 이끼벌레 덩어리 같은 것이 들어차 있었다는 것을 메갈리아는 극적으로 보여주었을 뿐이다.


나는 최근 메갈리아를 접하고 나서 나 역시 사회적으로는 ‘한남충’이나 ‘씹치남’에 불과한 존재이고, 우리 가족 내에서도 어쩌면 오래도록 ‘애비충’이었을지 모른다는 사실에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아니야, 나는 ‘탈치남’이거나 ‘정상남’이라고 우겨본다고 해도 무의미한 것이 여성들의 존재부정 상태에 기초한 '한남충들의 아름다운 세상'에서 오랫동안 누려온 부당한 기득권들에 비하면 내가 지금 도달해 있다고 생각하는 알량한 자각의 수준이라는 것은 정말로 가소롭기 짝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명인 인하대 교수/문학평론가·계간 〈황해문화〉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