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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예전의 글들이 주는 교훈

스트레스의 강도를 측정하는 나만의 방법이 있다. 얼마나 단기간에 집 안에 새로운 수첩과 볼펜 등 문구류가 쌓이는지를 보면 된다. 그 어느 날 서울 땅을 처음 밟고 핫트랙스라는 문구점의 존재를 깨달았던 시절부터 지금껏 나는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참새처럼 잔뜩 쌓인 수첩과 볼펜 더미를 기웃기웃하고 있다. 


손으로 쓸 거리를 잡고 왼손으로 누른 종이류에 서걱서걱 내 흔적을 기록하는 일. 나에게 손으로 글씨를 쓴다는 건 곧 내 자신에 대한 믿음이 줄곧 이어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새로운 마음을 먹자 다잡을 때마다 일기를 쓰던 버릇은, 씀씀이가 조금 커지고 난 뒤부터는 곧 펜이나 수첩을 새로 사는 버릇으로 바뀌었다. 


일주일 하고도 반 전에 새로 샀던 아이보리색 수첩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이름조차 써넣지 않았는데 포장을 뜯고 가방에 집어 넣는 느낌이 그때의 나에게 만족을 주었던 것 같다. 나같은 사치스런 문구 수집 애호가들이 더러 있기 때문에 핫트랙스라는 문방구가 면면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거겠지. 그야말로 자연에 위해를 입히는 무용한 탕진잼이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그 누구들처럼 전자기기를 사 모으는 대신 수첩을 사는 거니까! (탄소 배출은 조금 덜 하지 않을까?)


입 밖에 낼 수 없는 수다를 떨고 싶을 때, 쓰는 것은 많은 위안을 준다. 취재를 하다보면 가끔 등줄기가 오싹할 때도 더러 있다. 만일 큰 죄를 지어 내가 가진 것들을 압수수색 당하게 되면 증거인멸이고 뭐고 나는 바로 기소감이다. 안종범도 약과다. 김영한 전 민정수석이 나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기록해야 위안받는 사람은 그 버릇을 쉽게 바꿀 수가 없다. 검찰 출입을 오래 했던 한 선배는 집 안에 파쇄기를 들여놨다고 했다. 버려야 하는 문서는 바로바로 갈아버리는 게 취미가 됐다고 한다. 


나는 글을 오래 쌓아두고 읽는 편인데 반복해서 읽을 때마다 그때에 비해 2년이든 3년이든 내가 별로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는 점에 늘 실망한다. 이제 진화에 대한 강박을 좀 내려놓을 때도 되었지만 그래도 포기는 좀 멀었나보다. 책꽂이에 꽂힌 책들의 제목들이 딱 내 사정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세간에 좋다는, 글 깨나 썼다는 책들은 다 사모으면서 아직 포기하지 못한 욕망을 뻔히 전시하고 있다. 읽을 시간도 없으면서 사 모으기에 급급했던 조바심도 섞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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