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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구독 요청을 받은 날 새로운 삶을 막 시작하는 친구의 첫 걸음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누구 말마따나 한국인들이라 약속을 퍽 잘 지켜서인지, 유독 사랑스러운 이 친구의 시작을 응원하는 이들의 진심이 모아져서인지 밤 9시가 넘어서자 기약했던 이들이 거진 전부 다 모였다. 얼굴들이 닮았다. 신기한 점이었다. 친구의 어떤 일부를 조금씩 다 닮아있는 이들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다소 나른해보이는 분위기도, 집시 같은 자유분방함도, 처음 보는 이들에게도 열려 있는 넉넉한 틈도. 어딘가 익숙한 면모들이 있어선지 분명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몰랐던 이들인데도 불편한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형형색색의 빛을 뿜어내는 미러볼이 돌아가는 방에서 "어떤 글을 쓰더라도 난 네 글을 꼭 구독할거야"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니까 이젠 제발 글 좀 쓰라는 .. 더보기
길모어걸스 한 해의 스케치(2016)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타이틀 글씨체를 꼭 저랬어야 했을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퇴근길. 망설이다 결국 마트에 가서 술을 잔뜩 사왔다. 맥주 네 캔에 화이트 와인 한 병 그리고 막걸리 한 병까지. 저녁을 대충 감자칩과 맥주로 떼우려고 했는데 결국 와인 한 병도 뽀갰다. 사실 길모어걸스를 선택한 데에 큰 의미가 부여된 건 아니었다. 유년이라면 유년이었을 세월을 정리해야 한다는, 그래서 지금 내가 있기까지 적잖은 영향을 준 그 시리즈의 마지막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류의 의미 부여 따위도 없었다. 내 시간을 죽이는 데 일조해왔던 넷플릭스 메인페이지에 나도 모를 복잡한 알고리즘을 거쳐 이 시리즈가 표출돼 있었을 뿐. 90분 남짓한 에피소드 네 개로 이뤄진 고작 1년간을 다.. 더보기
예전의 글들이 주는 교훈 스트레스의 강도를 측정하는 나만의 방법이 있다. 얼마나 단기간에 집 안에 새로운 수첩과 볼펜 등 문구류가 쌓이는지를 보면 된다. 그 어느 날 서울 땅을 처음 밟고 핫트랙스라는 문구점의 존재를 깨달았던 시절부터 지금껏 나는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참새처럼 잔뜩 쌓인 수첩과 볼펜 더미를 기웃기웃하고 있다. 손으로 쓸 거리를 잡고 왼손으로 누른 종이류에 서걱서걱 내 흔적을 기록하는 일. 나에게 손으로 글씨를 쓴다는 건 곧 내 자신에 대한 믿음이 줄곧 이어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새로운 마음을 먹자 다잡을 때마다 일기를 쓰던 버릇은, 씀씀이가 조금 커지고 난 뒤부터는 곧 펜이나 수첩을 새로 사는 버릇으로 바뀌었다. 일주일 하고도 반 전에 새로 샀던 아이보리색 수첩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이름조차 써넣.. 더보기
남들이 보고 싶어하는 글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대학생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심지어 나는 아직도 엑셀을 맘대로 하지 못하잖아? 생각만큼 능력치가 발전하지 않고 그대로인 것 같아 스트레스를 받는다. 평생 콤플렉스가 따를 수밖에 없는 직업을 아주 오래 전부터 선택해놓고 이제와서 스트레스를 토로하고 있는 게 웃기긴 하다. 하지만 생각없이 들뜬 마음에 살던 얼마간이 지나고 다시 스트레스의 계절이 돌아왔다는 것은 이제는 드디어 본 궤도에 안착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맘 한쪽에선 (변태같게도..) 다행스런 느낌이 피어오르기도 한다. 기초, 바탕, 본령, 초식 따위를 들먹이고 언급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어떤 콘텐츠를 내놓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게 일의 시작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걸 지금 있는 부서에 오고나서.. 더보기
매순간이 기회비용 남기지 않고 뭔가를 모두 챙기기 위해서는 쉽게 눈치채지 못하는 작은 어떤 것이라도 희생해야하기 마련이다. 오늘도 그랬다. 오후 리포트가 있었지만 놓치기 아까운 약속 때문에 무리했다. 오디오 읽을 조용한 곳 찾기가 고역이었다. 새 립글로즈까지 샀지만 직원 전용 룸을 열어주지 않았던 매몰찬 화장품 가게 덕에 추운 길거리를 십여 분간 헤맸다.결국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착하게 생긴 약사님이 운영하는 약국 안에 들어가 양해를 구하고 후닥닥 읽었다. 약국 안에 가만히 앉아있던 손님 한 명이 나를 신기하다는 듯이 계속 쳐다봤다. 저분들은 아마 한동안 내 동충하초 기사를 잊지 못할 거야. 집에 가서 회사와 동충하초 검색어를 한번씩 쳐봤겠지. 오늘 난데없이 뛰어 들어온 불쌍해 보이던 처자가 이 양반이었구나, 하고. 사회.. 더보기
편지가 와르르르 수습 때 사다놓은 핸즈프리 블루투스를 찾아 이리저리 서랍을 뒤졌다. 이사온 지도 벌써 1년이 넘었지만 서랍정리는 엄두도 못 냈다. 기기가 있을 만한 서랍을 헤집어보니 작은 종이가방에 넣어 둔 편지 꾸러미가 나왔다. 대학시절 다정한 글씨로 꾹꾹 눌러 써내려간 편지와 엽서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지나간 추억은 왜 이렇게 다 귀여울까. 글씨마다 박제된 그때 그 사람들의 얼굴도 생각이 나고, 저마다 다른 개성이 뚝뚝 넘쳐흘러 슬몃 웃음이 난다. 하마터면 가슴이 서늘할 뻔했던 두터운 편지들도 하나하나 넘기며 미소가 지어지는 걸 보면 모든 편지들을 애써 버리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나는 많이 자랐구나. 위로가 돼 주어 고맙다는 수 년 전의 글씨들이 오늘 내 마음에 큰 위로. 어딘가 버리지 않은 편지들 틈에 있.. 더보기
기법보다 관점 우리는 서로를 무시한다. 논설을 프로파간다라 비판하고 스트레이트를 영혼이 없다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논설을 자유롭게 파생시키는 스트레이트가 옳은 것일까. 스스로가 논설을 담은 스트레이트가 옳은 것일까. 나는 물론 아직은 이 고민들에 답을 명쾌하게 내리진 못하겠다. 공개되지 않은 사실을 처음으로 완벽하게 파악하고 보도하는 것? 접근이 어려운 민감한 정보를 파악해내는 것? 아니면 정해진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정보를 파악해내는 것? 흔히 '출세작'을 쓰는 기자들은 위와 같은 것들에 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무엇이 옳으냐'는 대답과 별개로 최소한 분명한 것은 위에서 언급한 것들이 모두 '기법'이라는 것이다. 기법에 능한 기자들은 세상을 들썩이게 할 '출세작'을 쓸 가능성이 높다. 자생능력이 부족한 저연.. 더보기
말보다 더 강한 건 언제나 행동 그러나 행동하기 위해 말이 앞서야 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것부터 시작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을 때, 부유하는 생각들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느낄 때. 말은 계획짜는 것을 돕고, 행동에 사명감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게 해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머릿속에 떠오른 아주 간단한 한 문장으로부터 책 한 권이 나올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떠올릴 때면 항상 버지니아 울프의 첫 문장이 자동으로 소환된다. "꽃을 사야겠어"라고 댈러웨이 부인은 말했다. 한 문장 안에 무조건 심오한 내용을 담을 필요는 없다. 다만 이 한 마디로부터 캐릭터에게서 가장 단순한 열망을, 그리고 그 다음 무슨 행동을 할지에 대한 가장 확고한 대답을 듣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세계에 무엇이든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시작'.. 더보기
여의도에서 새벽부터 빠듯하게 준비했던 기사가 빠졌다. 그래도 일은 남아 있어서 마무리할 겸 적당한 보금자리를 두리번댄다.여의도는 적당히 좋은 곳. 몇 미터 근방 국회에는 또 여럿이 정신없이 여럿의 뒤를 따라붙으며 키보드를 쪼작이고 있다. 변화무쌍함은 내 직업의 천형, 그래도 요즘은 많이 적응됐다. 선배들은 가끔 날더러 왜 그렇게 이상하게 침착하냐고 그런다. 일부러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뭔가를 말할 때는 나도 모르게 침착해진다. 새벽에 그날 격파해야 하는 테스크들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이 그려지면 나도 그렇게 침착하지만은 않은데. ㅎㅎ손에 잡히는 순간까지 초조한데 겉으로 별로 드러나진 않는 모양이다. 단점은 아니다. .... 라고 쓰던 중 전화와서 지시가 떨어졌다. ㅋ .... 더보기
소년의 죽음과 멜랑콜리 7살 신원영 군이 끝내 죽은 채로 발견됐다. 3월이 왔지만 봄이 오지 않은 평택의 동토에서,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왼쪽 이마에 거즈를 붙인 채로 옆으로 고꾸러져 추리닝을 입고 있었다 했다. "경찰 생활 하면서도 이렇게 눈물이 나는 사건은 처음이었어요." 경기도 평택서는 강력 사건들이 그래도 좀 있는 경찰서다. 미군과 관련한 사건도 많이 일어나고, 세상 이목을 집중시키는 몇 사건들로 그래도 기자들을 몇차례 치러 본 베테랑 형사들이 포진해 있다. 한숨을 연달아 푹푹 내쉬는 강력반 형사들의 목소리가 괜히 떨리는 게 아니었다. "살해는 안했어요"라고 말했던 여자와 책임감 없던 아버지가 끝내 어린 소년을 땅에 파묻었다. 얼어붙은 땅에서 발견된 원영이는 발견된지 하루만에 조촐하게 화장됐다. 어린 소년은 끝까지 추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