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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니체에 관한 몇 가지 문장들 2

백승영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p344 

힘 싸움에서 의지가 느끼는 쾌감은 의지의 만족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도달된 힘 상태에 대한 불만족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의지는 언제나 '그 이상'을 원하는 것이다. 복종하는 의지의 불쾌감도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지쳐버려 느끼는 불쾌감과는 다르다. 이것은 '저항에의 무능력' 외의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힘 싸움에서 느끼는 의지의 불쾌감에는 오히려 저항하는 것의 도발이 속한다. 불쾌감은 이렇듯 "힘을 강화하는 자극제"로 작용한다. 이렇듯 고통이나 불쾌는 힘 싸움에서는 그 과정의 본질적인 요소로서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기능을 한다. 스스로를 지속적인 과정으로 드러내는 힘에의 의지는 창조적이기에 고통 받는 파토스다. 


이진우 <니체, 실험적 사유와 극단의 사상>

p149

행복을 발명했다고 생각하며 눈을 깜박거리는 마지막 인간이 보편화된 우리 시대에 과연 이러한 자유의 본능이 있는가? 우리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새롭게 창조하려 하기보다는 기존의 관계를 차선의 제도로 유지하려 하지 않는가? 우리는 기술 권력에서 나타나는 우리 자신의 무시무시함을 예감하면서도 인간과 자연의 새로운 관계를 감히 시도하지 못하지 않는가? 우리가 너무나 쉽게 입에 올리는 '인간 존엄'이 신이 없는 시대에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가치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인간 존엄을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를 갖지 못한 것은 아닌가? 우리는 인류 문명을 통해 인간애를 실현할 수 있는 잠재력은 발전시켰으면서도 이 잠재력을 실현하는 데 소홀한 것은 아닌가? 우리가 이런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면, 자기 긍정과 자기 극복을 전파하는 차라투스트라의 초인은 여전히 매력적인 사상이다. 니체는 문명을 통해 축적된 인간성의 잠재력을 실현시킬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삶을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인류의 초인, 즉 보다 높은 유형의 인간을 꿈꾸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실존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삶의 형식은 여전히 필수적이다. 죽은 신의 사회의 현대인은 자신의 삶을 위해서도 초인의 실존 예술을 필요로 한다. 이런 점에서 니체는 21세기 현대인의 운명이다. 


 "인간들은 왜 존재하는가? '인간'이 왜 존재하는지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러나 너는 무엇을 위해 거기에 존재하는가, 이것을 네게 물으라. 그리고 네가 그 물음에 답할 수 없다면, 너는 스스로 목표들, 높고 고귀한 목표들을 설정하고, 그것으로 몰락하라! 나는 위대하고 불가능한 것으로 몰락하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의 목적을 알지 못한다. animae magnae prodigus.[각주:1]"



김진석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

p275

철학의 높이에서 민주주의를 대놓고 비판했다는 점에서 니체는 세계를 철학적으로 사유한 마지막 인간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철학적으로 고귀한 강자'가 잡스러운 민주주의에 대해 우월성을 가진 세계를 암암리에 전제했다. 모든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그는 고귀하고 위대한 것이 존재하는 세상을 꿈꾸었던 것이다. 


철학이 힘을 잃을 뿐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의 적으로까지 내몰리는 이 상황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절박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1990년대 후반 이후 한국에서도 이미 그 상황은 진행되고 있었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다소 모호한 이름으로 불리던 위기 상황의 핵심은 아마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이 현실에 대해 확보하고 있었던 발언의 힘을 잃어버렸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인문학자들은 그 상황의 핵심을 꿰뚫어보는 대신, '인문학의 위기'라는 깃발 아래에서 다시 그 잃어버린 인문학적 정신을 회복하려고 애를 썼다. 인문학 가운데서 그 위기를 가장 가까이에서 경험한 것이 철학이었고 후유증을 심하게 앓은 것도 철학이었는데 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 위기는 철학뿐 아니라 인문학에게 그냥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다. 철학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위기에 내맡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위기는 물론 한국에서는 최근에 비로소 피부로 느끼는 문제지만 유럽에서는 이미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다양한 이름으로 그 위기가 예감되고 예측되었다. 특히 철학적 순수성과 권위에 근거해 민주주의를 비판한 니체는 이 위기의 한가운데에서 대항했다. 그것도 매우 비극적이고도 고양된 방식으로. 특히 그의 민주주의 비판은 철하의 이름으로 비극적 폭력을 정당화한 점이 있고, 그 일은 오늘날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사람에게는 다름 아닌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일로 여겨진다. 그래서 탈현대주의자로 스스로 자처하는 리처드 로티조차 니체를 "자유민주주의의 적"으로 여기는 일이 벌어졌다. 


p290

오늘 우리가 그를 정치학적으로 분석하면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성과는 권력과 폭력에 관한 그의 발언을 민주주의의 진행과정에 대한 성찰로 받아들이는 것이리라. 그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그렇게 비판한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들이 폭력과 권력의 문제를 배제한 채 추상적으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말한다는 데 있다. 이 문제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논의를 조금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만일 '만인의 동등한 권리'가 실제로 현실에서 달성된다면 그리고 그렇게 달성될 것이라는 믿음이 대다수 사람들에게 공유된다면 니체의 민주주의 비판은 공허할 뿐 아니라 전적으로 틀린 것일 터다. 그러나 오늘의 시점에서도 자유와 평등은 여전히 문제적이다. 


  1. 위대한 영혼은 아낌없이 후하다. 니체는 호라티우스의 이 시구를 <반시대적 고찰>에서 처음 사용한다. "너 스스로 하나의 목표, 하나의 목적, '그것 때문에', 높고 고귀한 '그것 때문에'를 설정함으로써 너의 현존재의 의미를 차후에 정당화하려고 하라. 단지 그로 인해서만 몰락하라-위대하고 불가능한 것으로, 위대한 영혼을 아끼지 않고 몰락하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의 목적을 알지 못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