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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실패의 기억



폭스파이어

Foxfire 
 8
감독
로랑 캉테
출연
미셸 놀덴알리 리버트타마라 호프카티 코스니조리스 자스키
정보
드라마 | 프랑스, 캐나다 | 143 분 | -

상암 CGV. 무비꼴라쥬 시네마토크.



미국판 <써니>라 하기엔 과소하고, 프로파간다 영화라 하기엔 과도하다. 1955년 미국, "모두가 행복만을 말할 때" 혁명의 계보를 잇기로 자처하고 나선 소녀 갱단의 이야기다. 미국보다 한국에서 먼저 개봉했다. 이동진 평론가가 여러번 언급했던 것처럼 주제의식에서 감독의 균형 감각이 돋보이는 영화였다. 성장영화로 치부할 수 없을 만큼 단단한 시대적, 정치적 단초에서 출발한 영화였고 또 그렇다고 해서 정치색 강한 편향적인 영화로 보기엔 소녀들의 실패가 두드러졌다. 

이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실패는 두 가지 혹은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영화 후방에서 더없이 무기력한 모습으로 나타났던 하층 기성 세대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다. 소녀들이 혁명을 모의할 때 그들은 물끄러미 소녀들에게 시선을 한 번 던질 뿐이다. 제재도, 동의도, 그 어떤 의사표명으로도 그들의 존재감을 부각하려는 시도가 이뤄지지 않는다. 그들은 '부모'라는 이름으로 작중 인물에 걸터앉아 있을 뿐이다. 이는 "아메리칸 드림"이 역동적으로 부상하던 1950년대 미국의 무대 뒤 긴 그림자였다. 안정과 질서를 바탕으로 '행복'을 맹목적으로 추구했던 중산층 속물주의의 든든한 뒷받침이자 부조리의 방관자이며 동시에 재생산자이기도 했다. 그들은 침묵함으로 '고여있는' 불행에 헌신했으며 무기력함으로 존재감을 증명하는 데 실패했다. 

두 번째 실패는 연대의 실패다. 미성년, 여성, 하층계급이라는 중첩된 약자였던 소녀들에게 어쩌면 이미 이 실패는 내정된 것이었다. 로랑 캉테 감독(물론 원작자의 설정 그대로였지만 영화적으로 충분히 각색 가능한 요소들이었으므로)의 영리한 균형 감각이 여기서도 나타난다. 이상주의의 실현을 고정된 문법 하에서 실패로 종지부 찍지 않기 위해 실패의 필연적인 요소들을 가져다 끼워맞췄다. 남성들의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처음 결성됐던 폭스파이어는 자연사 박물관에서의 시퀀스를 통해 통시적, 공시적으로 역사 속 모든 핍박받는 여성들의 연대로의 확장(이동진)을 꾀하기도 하지만 결국 인종주의의 벽을 넘지 못한다. 창 밖에서 투표 결과를 기다리던 흑인 소녀의 실망자약한 표정이 말해주듯 우정과 관용이 넘쳐흐를 듯했던 폭스파이어에서 "흑인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단지 "흑인이기 때문"이라는 단순하고 선명한 편견밖에 없었다. 

이동진은 폭스파이어의 실패 원인이 "리더와 구성원들 간 너무나도 컸던 이상주의의 격차"라 언급하기도 했지만 리더였던 렉스 역시 감독(혹은 원작자)이 애초에 설정했던 한계를 확고하게 뛰어넘지 못한다. 현실에서 렉스가 그들의 동맹으로 꾀할 수 있었던 운동은 고작 그들의 여성성을 도구로 이용해 남성들에게 돈을 뜯어내는 일이었다. 결국 그들의 "자매애"와 혁명적 이상주의는 '남성본위사회'라는 시스템 하에서 이뤄질 뿐이었고 그들 안에서도 '돈을 잘 벌어올 수 있는' 매력을 놓고 차별과 무시가 발생한다. 렉스는 다양한 면모에서 발견되는 카리스마적 권위에도 불구하고 한 집단을 완전히 장악하는 데도 실패한다. 렉스 역시 여성 권익을 향상하고 도구적 여성성을 타파하기에 한참 모자란 소녀였다. 끝내 완전한 연대를 이루지 못했던 집단의 미성숙함과 편견, 그리고 리더의 한계는 폭스파이어식의 연대가 처절한 실패로 끝나게 된 이유였다. 

다만 세 번째로 언급할 만한 것이 애매하다. 이 애매한 세 번째는 혁명에 관한 영화의 문법이다. 감독은 중점적인 계급 갈등의 한 축에 선 중년 사내에게 공산주의에 대한 노골적이고 원색적인 알레르기성 반응을 일으킴과 동시에 고결함을 첨가함으로써 놀라울 만한 균형감각의 미학을 보여준다. 주목할 것은 이 균형 감각의 연장선에 놓인 다른 한 축, 바로 혁명 세력이 직접적으로 표출하고 있는 '폭력성'이다. 이 영화는 사회 질서를 배반하고 연대를 꿈꾸는 혁명 세력이 얼마나 파시즘과 가까이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대안 세력, 특히나 혁명 세력은 본질적으로 '권력'에 관한 한 주류 세력 기득권이 담지한 패권주의 성향을 공유한다. 혁명 계급은 기득권 세력 하에 종횡으로 구속된 느슨한 연대 형태를 보이는 중간 계급보다 훨씬 권력 이론에 집착한다. 개인주의, 물신주의, 속물주의로 이른바 '주류 사회'를 굳건케 하는 중간층은 무기력으로, 침묵으로 기득권의 질서에 호응하고 역시 마찬가지로 무기력, 침묵으로 하위 계급(혁명 의지 계급)의 전복에 저항한다. 이들은 권력에 그다지 큰 뜻이 없으며 숙고도 하지 않는다. 이제까지 그들의 생활을 가능케 했던 미시적인 것들에 반응하고 예상 가능한 행복을 기대하며 사는 보수주의자들이다. 그래서 주류 사회 기득권층이 견고하게 건축해놓은 '질서' 속의 도덕에 누구보다 순수하게 승복할 수 있다. '관용'이니 '이타주의' 같은 덕목들은 비판적 자각없이 중간층에게 학습되고 전수된다. 

반면 혁명 계급에게 도덕은 역시 저항의 대상이다. 목적을 위해 폭력에 훨씬 더 낮은 문턱을 허용하고 있는 혁명 세력이 자기 힘에 도취되지 않는 현명한 철인의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야 그 부작용의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요컨대 대의로 시작한 모든 운동들은 폭력의 유혹에 늘상 노출돼 있다. 처음으로 완전한 일탈을 시도한 폭스파이어가 애꿎은 노인의 창문을 깨고, 자신들의 힘에 도취해 차를 절도하는 장면은 '혁명의 실패'에 대해서도 곱씹어보게 한다.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사회주의의 기치를 걸고 한 집에서 공동 생활을 하는 폭스파이어가 서서히 폭력에 익숙해지며 몰락하는 과정에서 보수적 논자들이나 언론이 이 영화에서 꼽을 주제문을 촛불 정국이나 여러 시위 사례들과 연결지어 "혁명의 (필연적) 실패" 혹은 "이상주의의 변질"을 꼽을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로랑 캉테는 굳이 이분법으로 따지자면 혁명의 편에 선 감독이다. 미숙한 소녀들의 실패한 혁명을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균형있게 전했지만 탈주에 성공한 렉스의 끝나지 않은 혁명을 에필로그 부분에 삽입함으로써 자신의 스탠스를 넌지시 비춘다. 불투명한 차창 안의 매디가 통탄한 표정을 머금고 렉스와의 옛 추억을 회상하는 끝장면은 그야말로 "그때는 행복했어"라 말하는 것으로 족한 혁명의 낭만성도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결국 영화 속 세 번째 화두, 실패의 문법 속에 갇힌 혁명은 낭만을 통해 활로를 찾고 있다. 단지 한 때의 치기와 열정이 "그때는 행복했어"라는 한 마디로만 남는다고 해서 그것이 완전히 실패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혁명이 끝난 자리의 통탄과 회한, 한숨과 씁쓸한 표정이 역설적으로 혁명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미래의 어느날 끝내 후회할 수 있을지언정 지금, 이 자리에서 "영혼이 유일하게 존재하는 시간"을 위해 "타오르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인간은 항상 미래를 꿈꾼다. 그렇기에 혁명은 과거 시제에 존재하며, 현재에도 존재할 수 있다. 혁명에 관한 오묘한 감독의 수사가 실패나 가능성 중 어느 하나만을 언급하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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