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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과제를 하다가

김영하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읽은 단편들과 장편들을 모으고 적합한 접점을 찾아본다. '작가론'을 쓸 때 작품 안에서만 단서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작가와 나의 만남이 작품만이 아닌 다른 방식이 많을 경우 더욱 그렇다. 팟캐스트를 진행했다면 팟캐스트를 진행했던 그 목소리대로 작품이 읽히기 마련이다. 행간에 스민 프로이트적 분석을 내놓기 마련이다. 일전의 인터뷰 기사들을 참조하게 되기 마련이다. '작품성'이란 것처럼 허구적인 것도 없다. 


김영하에 대해 검색을 하다가 이른바 최고은 논쟁이란 기사 꾸러미를 발견했다. 남은 김치와 쌀이 있으면 더 부탁한다는 쪽지를 남겨두고 발견돼 사회적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그녀가 김영하의 한예종 제자였다. 문학평론가 조영일과의 논쟁이었다. 애초에 최고은 작가를 두고 시작된 논쟁은 아니었다. 소설가는 자기 규정에 따라 이뤄지나, 어떤 입지, 의례와 같은 등용문을 통해 걸러지는가 하는 근본적인 논쟁이 '생활고'쪽으로 옮아간 경우였다. 김영하는 스스로 예술가를 선언하라는 쪽이었다. 그리고 영악하게 살아남으라고 했다. 신춘문예 등으로 쳐놓은 진입장벽이 승자와 패자의 논리를 낳으면서 문단의 생계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투의 발언을 하기도 한 모양이었다. 조영일은 구조 개선이 우선이라는 쪽이었다. 그러나 자기 선언만으로 우월의식에 고취된 글쓰기는 작가의 글쓰기가 아니라 했다. 논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김영하의 다른 제자였던 김사과가 삶과 예술 모두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글을 내놓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는 김영하와 조영일 모두 비슷한 대안(재단을 통한 기금 조성 등)을 내놓았지만 이 사건으로 김영하는 온라인 절필을 선언했다. 


편의점에서 폐지노인이 긁어먹었떤 1500원 카스텔라가 아닌 3000원짜리 번듯한 도시락을 사먹을 수 있다는 자괴감에서 멀지 않은 물음이었다. 무익한 것의 쓸모를 말하기 위해서 작가는 얼마나 굶어야 하는가? 문청을 자처했던 그 어느 날인가의 자기소개서가 부끄러워졌다. 나는 절대로 배고프게 살 수 없다. 어쩐지 우울해져서 과제를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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