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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칼럼

[허핑턴]20140521 한신대 김종엽 교수 기고

*훌륭한 칼럼이다. 수긍되는 논리다. 

*우리 사회의 평범한 악이 어떻게 생성되는지 그 초기단계를 분석한 글이다. 

*대안부가 아쉽다. 고민해보자. 


세월호가 드러낸 배반의 연쇄 http://www.huffingtonpost.kr/jongyup-kim/


세월호 사건은 많은 동영상 자료를 남겼는데, 그것이 우리들의 마음을 찌른다. 침몰하는 배 속에서 어린 학생들이 찍은 동영상이 특히 그렇다. 끝까지 보기에 너무 힘겹다. 이렇게 보기 괴로운 것 중에는 배를 버리고 먼저 탈출하는 선장과 선원의 모습도 있다. 그 장면을 거듭해서 내보낸 공중파 방송의 속내를 짐작하긴 어렵지 않다. 하지만 방송사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 장면은 트라우마적이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그런 말이 마음 속에서 치민다. 이 말은 분노의 감정을 담고 있다. 의문문 형식이지만, 그 속에 담긴 생각은 "저럴 수는 없다, 저래서는 안 된다"는 단호한 비판이다. 하지만 의문문이라는 형식이 사라지지 않고 마음에 남는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왜 퇴선 명령을 내리지 않았을까?"


"대기하라" 그들의 행동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승객들 모두가 갑판으로 뛰쳐나오고 그러면 자신들이 구조될 확률이 낮아질 것을 우려한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이들이 지독하게 이기적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해경이 공개한 동영상을 보면, 탈출 전후 그들의 행동은 아주 태연하다. 구조 직후 선원 가운데 하나는 전화를 걸며 한갓지게 행동한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분노 어린 질문 형식에 이미 어떤 답이 함축되어 있긴 하다. "이런 나쁜 놈들" "인면수심이네" "미친 자식들 아니야" 이런 생각이 답처럼 떠오른다. 그들이 아예 '우리'와 다른 종자, 가령 악마라면 분노가 치밀긴 해도 이해가 어렵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악마가 아니라는 것, 어쩌면 오늘 길거리에 스친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오히려 그들의 모습이, 우리 사회가 이르게 된 어떤 심각한 상태를 예시하는 것일 수 있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그리고 그런 생각에 이르면 명치끝에 뭔가 걸린 듯이 답답해진다.


이런 질문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일상적인 의미에서 이해는 상대를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것을 뜻하며 때로는 용서와도 연결된다. 하지만 선원이나 해경의 행동을 용서할 생각이 전혀 없을 때에도 이해의 작업은 필요하다.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진상에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으며, 무엇보다 "어떻게 저럴 수 있는가?"라는 질문의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해 작업은 "자비의 원칙(principle of charity)"을 요구한다. 타자의 말이나 행동이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고 전제해야 하는 것이다. 선장과 선원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행동이 그들 자신에게는 타당한 점이 있다고 봐야 한다. 종종 우리 언론이나 미국 언론이 그렇게 하듯이 김정일 위원장이나 그 아들 김정은을 "미친" 지도자로 파악하는 것은 이들을 좋아하느냐 또는 싫어하느냐와 무관하게 이해를 포기한 행동이다. 이해를 위해서는 그들의 행동에 이유가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내 보기에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말보다 태도와 거동에 주목해야 한다. 태도나 거동은 꾸미기 어렵고, 그만큼 행위자의 내면적 동기나 상황 파악을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경우 주목할 점은 해경이 구출할 때 이들이 보인 태연함이다. 팬티 차림 선장을 염두에 두면 태연하다는 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내 보기에 선원들의 동작 전반은 침착하며, 사태가 예측 범위를 벗어나지 않을 때 사람들이 보이는 태도였다. 이들이 진도 VTS와의 교신에서 거듭 해경이 왔는가를 묻는 모습, 구출 직전 전화기를 다시 찾으러 간 1등 항해사의 모습은 이런 추정을 강화한다. 이 태연함을 자비의 원칙에 입각해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들이 "해경이 도착했으니 그들이 승객들을 잘 구하겠지"하고 믿었다고 보는 것이다. 선원들은, 해경은 '자신들과 달리' 선의를 가지고 직무에 충실할 것이라 믿고 구조의 바통을 맘 편하게 해경에게 넘긴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마음 놓고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다. 만일 승객 수백 명이 죽게 될 것을 예상했다면, 혹은 사건 직후 대통령이 나서서 "살인과도 같은" 행동이라 묘사할 것을 예상했다면, 그들은 결코 태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선원들이 생각했듯이 해경은 자신들과 달랐을까? 현장에 처음 도착한 123정 함장은 인터뷰에서 세월호 가까이 배를 대면 함께 침몰할 것을 우려했다고 말했다. 자신의 안전이 우선이었고, 그 점에서 선원과 마찬가지로 이기적이었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해상 구조업무를 위한 해경의 훈련 및 장비 구입 예산은 형편없이 적었지만, 골프장을 짓는 데는 140억 정도의 예산을 썼다고 한다. 이런 보도는 해경이 누릴 수 있는 것에는 집착하지만 직무에 대한 충직성은 없었음을 말해준다. 더불어 왜 그들이 선원은 구해도 배 안의 승객은 구조하지 않았는지 짐작게 해준다. 그들은 연락이 되는 집단에 대해 할 줄 아는 일만 한 것이다.


변변한 잠수체계를 갖추지 못한 해경은 자신들에게 닥친 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해경은 자신과 가까운 언딘마린인더스트리에게 문제 해결의 바통을 넘겼다. 언딘은 '자신들과 달리' 구조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 믿은 것이며, 덤으로 자신들의 잘못도 잘 덮어 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만일 언딘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면, 해경이 해군 UDT와 SSU를 가로막고 자원봉사 하러 온 민간 잠수사를 밀쳐낼 만큼 '대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언딘은 독점적 사업권에서 얻을 이익에는 관심이 있었겠지만, 제대로 된 구조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런 연쇄는 세월호 침몰 이후뿐 아니라 이전으로도 거슬러 올라간다. 청해진 해운은 불법 개조, 과적, 고박 미비, 평형수 덜 채우기 등으로 사고위험을 잔뜩 높였지만, '자신들과 달리' 선원들은 비상사태를 잘 처리할 것이며, 구조는 해경이 잘 해줄 것이고, 손실은 보험회사가 메꿔 주리라 믿은 것 같다. 어제 뉴스에 의하면 세월호 구명벌 검사를 소홀히 한 혐의로 한국해양안전설비 대표 등이 구속됐다. 그들은 아마 자신은 검사를 대충해도 선사와 선원들이 구명벌 쓸 일을 만들지는 않으리라 믿은 것 같다. 마찬가지로 한국선급, 해운조합, 해수부는 업무는 태만하게 처리하고 이권을 누리는 데 더 신경을 썼지만, 선사는 '자신들과 달리' 자기 이익을 생각해서도 배를 침몰시킬 수준의 어리석음을 저지르진 않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생각의 출발점은 선원들과 해경이 "어떻게 저럴 수 있는가"를 이해해보려는 것이었지만, 그런 시도를 통해 도달하게 되는 것은 어떤 기묘한 믿음의 연쇄이다. 세월호 참사를 둘러싸고 일어난 일 뒤에는 "나는 무능하고 태만하며 직무는 제쳐놓고 특권을 탐닉하며 종종 부패하기까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나와 달리 직무에 충직하며 제대로 일을 해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의 연쇄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사회가 부여한 신뢰를 배반하지만 그 배반 때문에 팽개쳐진 과제를 누군가는 처리할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이 믿음은 보기보다 그렇게 역설적이지 않다. 부패나 배임을 통해서 이익을 얻으려는 이기적인 사람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가 부패나 배임으로 이익을 얻으려면 먼저 그에게 어떤 사회적 신뢰가 부여되어야 한다. 예컨대 해운조합이 과적이나 고박 미비 상태의 배를 출항시키지는 않으리라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관련 검사 권한이 부여된다. 그런데 그 경우 해운조합의 구성원이 사적 이익을 편취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 신뢰를 배반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조건만으로 배반이 일어나긴 쉽지 않다. 배반이 사고를 야기하면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배반이 야기할 위험한 일이 여러 겹의 안전장치를 가지고 있어서 그 가운데 하나만 충족해도 일어나기 어렵다면, 자신은 배반하지만 다른 이들은 충직한 세계를 가정할 수 있으며, 그런 가정이 배반을 불러들인다. 


이 가정은 그렇게 비현실적이지 않다. 세계는 실제로 충직함, 선의, 연대, 협동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세상의 신의와 선의를 더 많이 믿는 이들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을 배반함으로써 이익을 얻으려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자기를 제외한 타자의 선의가 전제되지 않고는 배반의 이익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공연장에 들어가기 위해서 줄을 섰을 때, 새치기 하는 사람을 생각해보라. 만일 모든 사람이 새치기를 시도하고 있다면, 그는 새치기에 성공할 수 없다. 사기꾼을 생각해보라. 사기를 치기 위해서는 속는 사람 그러니까 순진하게 믿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모두가 사기꾼인 세계에서는 사기로 이익을 얻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추론이 맞는다면, 세월호 참사는 그것을 둘러싼 행위자들이 살아가는 세계 그리고 그 배경을 이루는 우리 사회가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보여준다. 신뢰를 배반하고 선의를 약탈하는 일이 계속된 결과 그런 배반을 통해 이익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타자의 선의와 유대감이 심하게 고갈된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이제 자신들이 저지른 신뢰의 약탈이 야기한 위험을 방어하고 파괴를 치유할 타자가 저기 어딘가에 남아있다는 믿음을 배반자들 스스로 거두어 들여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뢰와 희망의 자원이 우리 사회에서 아예 증발돼 버렸다는 것은 아니다. 약탈자가 많은 사회에서도 그들에게 약탈될지언정 신뢰를 생성하는 이들이 어디엔가 있다. 아니 우리 사회에는 그런 이들이 여전히 많이 있다. 그렇지만 세월호 참사는 적어도 어디까지 신뢰의 약탈이 진행됐는지 증언한다. 우리는 해수부-해운조합/한국선급-청해진 해운-선장과 선원-해경-언딘의 연결 고리에서 타자에 대한 신뢰라는 바통을 이어받을 집단이 없었음을 목도했으며, 참사를 처리하는 국면에서 국가 관료들 그리고 국가 관료와 기업이 얽힌 지점에서 배반과 '먹튀'가 편만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신뢰 약탈자들 속에서도 그들과 달리 공익적 가치를 지킬 '순수 기업인' '순수 관료' '순수 대변인' '순수 대통령'이 없는 것이다.


'순수 대통령'이 없다는 말은 너무 심한가? 그렇지 않다. 박근혜 대통령은 "적폐"를 도려내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고 했다. 그런 면이 있다. 그러나 그 적폐와 관련해 대통령이 한 일이 무엇인가? 그는 숱한 공약을 폐기함으로써 자신이 신뢰 약탈자였음을 입증했으며, 그런 신뢰 배반이 더 큰 보상을 얻을 수 있는 '우월한' 전략이라는 나쁜 신호를 정부와 사회에 강력하게 전송해왔다. 적폐 위에 적폐를 쌓은 셈이다.


그뿐 아니다. 대통령은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윤창중을 대변인으로 임명하고, 채동욱 검찰총장을 찍어내고, 남재준 국정원장을 계속해서 신임함으로써 적폐를 충성의 연쇄로 재배열했다. 이로 인해 무책임과 무능력이 심화되었다. 더 나아가 이런 충성을 향한 재배열을 국가 관료를 넘어 언론사 안으로까지 깊게 관철시켰다. 그 결과는 오보와 의제 호도 그리고 '기레기'의 양산이었다.


이런 악덕의 연쇄가 수백 명의 어린 학생들과 무고한 승객들을 수장시킨 것인데, 대통령과 정치인들과 공중파와 보수언론은 '자신들과는 달리' 공익에 충실해야 했는데 '자신들처럼' 행동한 집단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며, 그들에게 책임의 폭탄을 돌리기에 여념이 없다. 이 참혹한 풍경을 비판하면, 문제만 생기면 대통령을 비난하는 우리 사회가 미개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나선다. 하지만 정작 미개한 것은 타자를 미개하게 보는 그 시선 자체이며, 비극적인 사건조차 충성의 연쇄 안으로 들어갈 기회로 보는 심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