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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전혀 반대의 논리로 까뒤집혀 모조리 반박 당하는 한이 있어도 심지가 굳고 단단한 글. 그런 글을 쓰고 싶다. 이상적인 글의 형태에 슬쩍 단서를 붙인 것은 세상 어디에도 누구에게나 '완벽한' 글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써야 하는 이상향의 글은 여태껏 내가 감탄해왔던 글과는 조금 다른 것이다. 물론 논리적으로 정합적이고 갖은 수식어구를 쓰지 않아도 의미가 정확하고 간결하게 전달되는 통상적인 '좋은 글'의 기준은 동일하다. 그러나 내가 요구받는 논술문의 형태는 개성이 크게 발현되지 않고 감정이 절제된, 그야말로 '정장을 입은 느낌'의 톤을 유지해야 하는 글이다. 내가 좋아하고 감탄했던 위태롭고, 아름다운 평론가들의 문체는 지금의 내 시험에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글로 평가받는 시험이란 공부하는 사람에게 한편으로는 큰 위안이기도, 또 절망이기도 하다. 누가 내 글을 읽고 마음이, 머리가 동하는가가 결정적인 평가의 잣대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글 자체의 내용이나 글을 이루는 내 사유의 구조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편의와 취향을 치밀하게 추론해 글에 반영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 논술고사실의 백지 앞에 대면하는 시시각각, 나는 정치력 테스트를 받는 기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시 수험생들에게 통용되는 좋은 글의 원칙과 기준은 대개 "쉽고 간명한 글"이라는 선에서 설명된다. "아름다운"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미학적 관점이야말로 가장 주관적 잣대이기 때문이다. 글을 쓸때마다 나의 감상과 미학적 관점을 존중하며 읽어줄 채점관들의 선의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누가 읽어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을 담백한 글이 좋은 논술문이 된다. 나도 물론 기필코 아름다운 글을 쓰겠다는 의지까지는 없다. 그러나 여태껏 내가 감응하고 줄을 쳐왔던 상당한 문장 단위의 독서들이 이 방식의 글에 많은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머리가 아프다. 형식적 기술을 떠올리고 절제하며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감 때문일까, 요즘에는 두뇌와 볼펜이 연동돼 쓰는 듯했던 일치의 순간이 통 찾아오질 않는다. 


결국 익숙해지는 것이 관건이다. 홉스는 "나는 쌍생아로 태어난다. 그 중 하나가 자신이고 다른 하나가 두려움이다"라 했다. 생존 자체도 공포라는데, 변화야말로 공포가 가장 많이 따르는 순간일 수밖에. 고통스러운 글의 변비가 이어지고 있지만 아득아득 노력하면 해결될 것이란 낙관이 지금의 나에겐 가장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누군가의 가장 어두웠던 시절에 대한 글들을 하나씩 살펴 읽으며 타인의 고통으로부터 또 힘을 얻는다. 그런데 잠은 언제 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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