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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취향의 시대

USB를 새로 구입한 기념으로 D드라이브를 정리했다. 음악 파일을 하나로 묶어 폴더로 정리하고, 보기 좋게 이름을 바꿔 정렬하고. 사진과 영화도 차곡차곡 쌓았다. 애써 모았던 음원들의 목록을 확인했다. 대개가 2~4년 정도 지난 것들. 


초등학교 때부터 좋아했던 디즈니 앨범들과 우리나라에서는 <그 남자 그 여자>로 번역됐던 일본 애니메이션 <카레카노>의 OST 앨범도 있다. 내가 최초로 접한 만화책이자 최후로 접한 만화책이기도한데 애니메이션 버전을 나는 더 좋아했다. 그 특유의 울적한 톤과 잠잠한 분위기가 뇌리에 박혔다. 지금도 나는 이 애니메이션이 세상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고 자부하는 15세 중학생 감성을 가장 잘 담은 순정 만화라 생각한다. 습하고 구름이 어두운 여름을 떠올리는 남자 주인공의 테마를 특히 좋아했다. 곡을 연주하겠다고 악보를 찾아 며칠을 서핑했고 집 근처 피아노 학원을 등록해 재즈 피아노를 배우겠다고 나서기도 했으니. 드라이브를 정리하다가 발견해 핸드폰에다 옮겨놓았다. 대학에 올라오고 지금 쓰는 노트북을 새로 사서도 이 OST 앨범을 듣고 싶었나보다. 


음원 제목들 하나하나마다 서린 추억들이 새록 떠올라 마음이 말랑말랑해진다. 나는 초등학생때부터 재즈를 좋아하던 애늙은이였다. 비 오는 날 아무도 없는 집에서 차를 한 잔 끓여다 조지 윈스턴 앨범을 주구장창 앉아 듣곤 했던, <냉정과 열정 사이>에 한껏 도취됐던 영락없는 조숙아였다. 미니홈피에서 일기를 끄적이고 글 잘쓰는 이들의 홈피를 들락거리며 그들의 OST 목록을 훑어봤던 것이 도움이 됐다. 그때 들었던 음악들이 지금도 내 취향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취향에 크게 신경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인생을 통틀어 그렇게 많지 않다. 음악은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가장 많이 들었던 것 같다. 그때는 음악을 들으며 글을 쓰는 것이 취미였기 때문에 나에게 가장 음악이 중요한 시기였다. 매일 하루를 그날 새벽 미니홈피에 등록해 둔 bgm을 들으며 일기를 쓰는 것으로 마감하던 때였다. 듣는 음악에 따라 쓰는 글도 달라졌으니까. 몇 시간을 가끔은 한 곡으로만, 많아도 네 곡 안의 범위에서 돌려 들었다. 생각해보면 그때 나에게 각인될 수밖에 없었던 음악들이 지금내 감성의 주춧돌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 여전히 나는 내가 좋아했던 음악을 좋아한다. 언제 들어도. 


대학에 와서 추천받은 음원들도 눈에 띈다. 지금은 카카오톡이나 라인에 밀려 형체도 찾아볼 수 없게 됐지만, 그때만 해도 네이트온으로 서로가 좋아하는 음악을 사이좋게 주고받았던 때였다. 나와 내 친구들은 네이트온으로 연애도 했다. 딩동, 하고 접속 표시가 올라오는 게 설렜던 순간도 있었다. 까마득한 옛날같다. 몇 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비슷한 애늙은이 출신 친구들을 만나면서 좋아하는 음악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시기기도 했다. '덕후'들이 그렇게 많은 줄 처음 알았다. 어떤 친구는 내가 지금도 좋아하는 한 가수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자기가 '스토커' 수준이었다고 고백하며 그 가수의 음악세계에 대한 수준높은 논평을 내놓아 나를 놀라게 했다. 또 어떤 친구는 매주 외국 팝 평론 사이트에서 괜찮은 신보를 확인하는 수고를 들이면서까지 취향을 가꿨다. 언제, 어느때 무슨 음악을 들어야할지 그런 친구들은 척척 알았다. 나 역시 심상치 않은 음악 취향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그런 친구들 앞에선 어쩔 수 없이 종종 주눅들었다. 


D드라이브에 모인 곡들의 면면이 재미있다. 가을같은 대화를 나누던 친구가 나에게 선물처럼 건넨, 그러나 네이트온 불안정으로 중간까지만 다운로드가 된 곡들도 남아있다. "이걸 들으면 혜경이 네가 생각나"라며 앨범을 전송해 준 조용하고 시크한 친구도 있었다. 참으로 낭만적인 시절이었도다. 음악은 추억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아! 취향의 시대! 불현듯 그때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요즘은 거의 음악을 듣지 않고 있다. 도서관에서 글을 쓰는데, 음악을 들을 일이 없다. 가끔 베토벤이나 바흐, 리스트, 바그너를 들으며 잠에서 깨려고 노력한다거나, 오고 가며 귀찮아 업데이트가 한창 늦어진 네이버 스트리밍 목록을 그대로 들을 뿐. 60년대와 70년대와 80년대의 사람들이 왜 여전히 존 덴버를 좋아하는지, 비틀즈와 U2 그리고 플레이밍 립스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다. 취향은 어디선가 멈춰버린다. 나도 10년, 20년이 지나도 윤상이나 이적, 누자베스나 엘보우, 소란을 들을 것이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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