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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를 만나고싶다



김영하 보물선 - 제4회 황순원 문학상 2004

저자
김영하 외 지음
출판사
중앙M&B | 2004-10-13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치밀한 구성과 힘찬 어조, <보물선> 황순원문학상 수상작인 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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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가들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다. 김영하는 일전의 한 인터뷰에서 어떤 사람을 작가로 이끄는 100%의 동기는 책이다라고 말했다. “삶이 묻어난, 진실한 글이야말로 좋은 글이다라고도 했다. 그러니까 김영하의 말대로라면 좋은 글을 쓰는 이들에게 글은 곧 삶이다. 그들로부터 쓰기의 유혹을 받는 이들은 그들의 글, 곧 그들의 삶에도 자연스레 관심이 기울어지기 마련이다. 좋은 글을 쓰는 이들이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장소에서 어떤 모양새로 생각을 하고 글을 쓰는지는 중요한 정보다


운 좋게 작가들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대학 시절을 홀라당 털어넣은 학보사에서 데스크가 되기 전 학술 기자로 1년을 있으면서 신인 작가 두 명을 인터뷰했다. 기고 청탁 때문에 중견 작가들과 통화도 했다. 017인지 011을 쓰던 김훈 작가에게는 안 합니다”, “두 마디를 들었다. 굵고 낮은 목소리. 그러나 아쉽게도 김영하와는 도무지 연락할 일이 없었다. 팟캐스트를 듣기 전엔 목소리도 몰랐다. 출판사로 연락을 한번 했지만 그땐 김영하가 뉴욕에서 한창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하던 때였다.

 

김영하는 2004년 그의 나이 36세에 단편 보물선으로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했다. 지금이 2014. 그러니까 10년이 흘렀다. 마흔 여섯. 최근에 읽은 인터뷰 기사는 살인자의 기억법을 출간한 후 부산에서였다. 새로 낸 작품 속 주인공 살인자의 내면을 어떻게 다뤘는지, 또 그가 얼마나 부산을 좋아했는지가 실렸다.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글만 읽어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나이듦의 낌새가 느껴지지 않는다. 기사를 검색해본다. 2004년 문학을 총결산한 연합뉴스 기사를 하나 발견했다. 김영하의 보물선서사의 부활이라는 꼭지 밑에 분류돼 있다. 지난해 정유정 7년의 밤이 베스트셀러가 될 때 여기저기서 서사의 부활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들이 쏟아졌던 기억이 난다. 예나 지금이나 소설판에서 중요한 건 서사다. 좋은 이야기에 대한 관심은 언제나 높지만 그만큼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 이야기들은 모자라다. 서사의 위기는 상존하고 가끔씩 부활의 낭보를 전하는 작가들이 깜짝 등장해 독자들을 즐겁게 한다. 김영하는 이 부활 진영의 중요한 선수다. 재미있는 소설을 쓴다. 다른 것들을 차치하더라도 그의 존재 가치는 이것으로도 충분하다.

 

자동차 정비 매뉴얼을 읽기도 하고요.” 어떤 책을 읽느냐는 뻔한 물음을 던지는 언젠가 다른 인터뷰에서 김영하는 이렇게 답했다. “소설가라고 소설만 읽진 않아요. 소설을 기본으로 하되 오히려 현실적인 읽기를 더 많이 하는 편이에요.” 자동차 정비 매뉴얼도 읽는다는데, 시사 주간지며 신문은 또 얼마나 열심히 읽을까.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글들을 열중해 읽는 그의 표정을 떠올리는 것도 어렵지 않다. 트위터였나. 나도 언젠가 이순신 동상이 왜 오른손에 칼자루를 쥐고 있는지 의아하다는 글 조각을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갑옷의 형태나 동상이 서 있는 자태가 제대로 고증되지 않았다는 질타였다. 일본 사무라이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는 글까지도 본 것 같다. 신안 보물선 이야기도 얼핏 들었다. 그렇다. 여기저기 흩어진 조각 글들과 정보들이 김영하에게는 훌륭한 이야깃거리가 됐다.

 

김영하는 누구보다 더 진실에 대해 섣불리 단언하지 않는 작가지만 그의 캐릭터들은 유독 선명하다. 재만과 형식이 앙드레 모루아의 프랑스사와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따위를 읽을 줄 알았던 역사학회에 낚이는장면부터 웃음이 새나왔다. 김영하는 신빙성 투쟁에 강하다. 괜히 이런 연혁을 넣었을 리 없다. 떠밀려 혁명의 선봉에 나섰다 기소유예 된 재만이 도서관행을 택하고 욕망의 피라미드 속에 철저히 복속된 펀드 매니저가 된다거나, 데모는 나가지도 않고 끝까지 학회에 눌러앉아 독불장군처럼 자기만의 역사 연구를 이어가는 형식이라거나. 주변에 있을 법한 고학번캐릭터들이 소설에 현실감을 부여한다.

 

형식은 소() 혁명주의자다. 이런 혁명주의자들을 거리에서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지하철 출구마다 기상에 상관없이 나와 불신지옥을 외치는 이들이나 횡단보도를 거닐며 하늘을 보고 노래를 부르는 중년의 여인, 학교 도서관에 기거하며 몇 십 년째 신입생들의 기이한 눈총을 받는 기인이나 주변의 물건들이 자신을 도청한다며 늘 언론사에 제보 전화를 거는 그 이들. 김영하는 우리 주변의 이 하찮은 혁명가들에게 열중한다. 자기고집을 놓지 않고 영원히 좌절하지 않는 이상주의자들에 대한 흥미를 감추지 못한다. 보물선에서도 마찬가지다

 

형식은 거리의 혁명주의자들에 비해 조금 더 프로파간다가 확고한 혁명가라 할까. 그는 광화문에 있는 이순신 동상은 일제의 계략에 의해 우리의 민족정기를 해칠 요량으로 세워졌다는 확고한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혁파 분쇄해야 한다는 사명을 실천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 반면 재만은 철저한 자본주의의 투기꾼이다.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욕망은 그의 이데올로기다. 그 역시 이를 실현하기 위해 체 게바라를 끌어들여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대학 동창에게 올가미를 씌운다. 각자의 욕망을 위해 그들이 이용하는 것은 다른 이들의 욕망이다. ‘보물선은 좋은 상징이었다. 개미 투자자들은 이 허울 좋은 욕망의 깃대 밑으로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그런데 계속 재만을 따라 전개되던 이야기의 시점(perspective)은 재만이 공모 혐의로 구속되자 돌연 사라진다. 승승장구를 달리던 재만이 몰락하는 과정은 두 페이지를 채 넘지도 못한다. 재만이 쌓아올린 욕망은 한 순간에 허물어졌다. 그를 중심에 둔 서사는 그의 몰락까지만 유효했다. 작가는 이렇게 야멸차게 재만에게서 관심을 거둔다. 그리고 마지막에 시선을 돌리는 곳은 이 모든 사단을 내놓고 종적을 감춘 우리의 형식이다. 교보 빌딩 앞에서 새로 세워진 동상을 지켜보다가 택시를 잡아타고 고속버스 터미널로 교교히 떠나는 형식의 모습에는 어쩐지 혁명 투사의 비장함까지 흐른다.

 

거리의 혁명가들을 만났던 처음의 뜨악함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지하철이나 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잘린 다리를 끌고 구걸하는 이들은 쉽게 풍경으로 스며들어 이윽고 사람들에게 자극을 주지 못한다. 기인에 대한 관심도 유효기간이 짧다. 도서관에서 늘 같은 페이지를 놓고 중얼거리는 기인에 대한 호기심도 신입생 때가 전부다. 그러나 김영하는 그들에게서 이야기를 발견한다. 입체 종이 인형을 홈을 따라 또각또각 세우듯 풍경으로부터 그들을 하나하나 오려내 이야기를 입힌다.

 

기인에 대한 열성적인 호기심 말고도 김영하 서사의 특징은 하나 더 있다. 그의 이야기들은 결코 메시지를 또박또박 발음하지 않는다. 일제의 야욕에 대항해 이순신 동상을 폭파하는 무책임할 만치 확고한 혁명가를 따라가면서도 어떤 몰락한 가치에 대한 각성도 힘주어 말하지 않고, 투기꾼의 몰락을 냉소적으로 그려내면서도 자본에 대한 비판은 그리 열띠지 않다. 이중간첩을 이야기하면서도(빛의 제국) 국가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은 그리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다. 김영하에게 무수한 잡글들과 뉴스들과 풍경들과 떠도는 소문들과 정보들은, 말 그대로 리얼리티를 위한 재료들로 쓰인다. 그가 건져낸 동시대의 풍경들은 일리가 있고 재미있다. 그런데 메시지는? 이 휘몰아드는 서사를 통해 독자들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동시대성을 띤 예민한 소재들은 두루두루 보이는데 그래서 김영하가 하고자 하는 말은?

 

없다. 그래서 허기지다. 그러나 이 허기짐. 이것이야말로 서사. 이 아연한 빈 칸. 채워줄 누군가를 끊임없이 기다리며 그때까지는 결코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이 빈 칸. 호남선을 타고 떠난 형식은 그 다음 무슨 모의를 꾸밀까. 구속 수사를 받고 있는 재만과 그의 조찬 모임 멤버들은 어떤 처분을 받게 될까. 신안 근처 보물선을 아직까지 찾고 있는 투자자들은 결국 어떻게 됐을까. 그래서 결국 이순신 동상은 일제의 야욕이 서린 쇠말뚝이었을까. 마지막 장을 넘기고도 남은 그의 방대한 빈 칸에는 무수한 물음표들이 서려있다. 그리고 이 빈 칸이야말로 이야기의 본질이다. 끊임없이 말하게 만들고 이어가게 하며 그러면서 새로운 이야기로 거듭 창조되는 것. 김영하는 누구보다 이야기의 생래와 본질을 적확하게 파악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재미있어서 어쩔 줄 모르겠어.’ 지난 주말 아랑은 왜를 읽으면서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주책없는 감상이었지만 고시 공부하던 친구는 생각보다 빨리 답장을 보내왔다. ‘큭큭 맞아. 나도 김영하 책 읽을 때마다 영화 찍어.’ 재미있다. 그것으로도 훌륭하다. 김영하의 소설은 서사의 좋은 희망이다. 김영하와 밥 먹고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커졌다. 김영하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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