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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줌의 사랑



위대한 개츠비

저자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09-12-1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20세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가장 탁월한 미국 소설소설가 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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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중에서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
한때 일어난 일은 그저 그뿐, 신화로 남겨질 만한 건 아무것도 없다.
로미오는 결핵으로 사망했고, 줄리엣은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났다.
어떤 사람들은 늙어빠진 노년이 될 때까지 오래오래 살아남았다.
눈물로 얼룩진 편지에 답장이 없다는 이유로
이승을 등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지막에는 코에 안경을 걸치고, 장미 꽃다발을 든
평범한 이웃 남자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정부의 남편이 갑자기 돌아와
고풍스러운 옷장 안에서 질식해 죽는 일도 없다!
구두끈과 만틸라, 스커트의 주름 장식이
사진에 나오는 데 방해가 되는 일도 없다.
아무도 영혼 속에 보스의 지옥을 품고 있지 않다!
아무도 권총을 들고 정원으로 나가진 않는다!
(어떤 이들은 두개골에 총알이 박혀 죽기도 했지만,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야전 병원의 들것 위에서 사망했다.)
심지어 무도회가 끝난 뒤 피로로 눈자위가 거무스레해진
저 황홀한 올림머리의 여인조차도
내가 아닌 댄스 파트너를 쫓아서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아무런 미련 없이.
이 은판 사진이 탄생하기 전, 아주 오래전에 살았던 그 누군가라면 또 모를까.
내가 아는 한 이 사진첩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
슬픔이 웃음이 되어 터져 나올 때까지 하루하루 무심하게 세월은 흐르고,
그렇게 위안을 얻은 그들은 결국 감기에 걸려 죽었다.

-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사진첩」 전문


2년쯤 전일까. 어떤 아나운서의 죽음 기사를 읽고 불현듯 이 시를 떠올렸던 기억이 난다. 이불을 덮어쓰고 옥상에서 뛰어내렸던 그 여자. 삼일동안 팔락거리는 이불 자락 속에 언뜻 언뜻 보이는 자그마한 발로 내 꿈에 나타났던 그 사람. 먹먹한 기분에 낮은 천장을 마주하고 잠에 깬 나는 그날들 동안 elbow 의 묵중한 노래들을 끼고 살았다. 

기억의 편린으로 간직돼 오던 이 시가 갑자기 떠오른 것은 오래전부터 벼르고 있었던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서였다. 강렬한 드라마와 장식 없이 대화만으로 금세 공기 진동수마저 느껴지는 작은 현실을 만들고야 마는 피츠제럴드의 화법이 김영하의 번역을 만나 더 활력을 얻었다. 번역자 김영하는 '표적을 빗나간 화살들이 끝내 명중한 자리들'로 이 소설을 설명한다. 이스트에그의 영롱한 불빛만치 반짝이는 이 소설 속에는 영국제 고급 셔츠 앞에서 울음을 터뜨린 데이지의 갈망과, 여러 속물들의 참을 수 없이 일상적인 욕망들, 그리고 끝내 위대해진 개츠비의 서사가 있다. 

순애보 서사의 진부함에서 탈주하는 데 성공한 이 책의 '위대함'에는 주인공 개츠비와 피츠제럴드의 삶이 묘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일부 지분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행간에 스며있는 개츠비의 좌절과 욕망, 또 지순함과 광폭함은 피츠제럴드의 전기와 연표에서 그 진정성을 더 획득한다. 때는 이미 20세기, 중세시대 신의 영성만큼이나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근대적 속물성에 피츠제럴드는 기꺼이 권좌를 내어준다. 욕망의 간접화를 기꺼이 시인한다. 데이지를 둘러싼 찬란한 후광이 실은 웨스트에그의 모든 조명을 합쳐도 대지 못할 이스트에그의 불빛이었음을, 그리고 이 데이지가 실은 대법관의 딸 젤다의 현현(顯現)이었음을 독자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어쩌면 피츠제럴드가 이 소설을 통해 그의 생과 젤다와의 사랑에서 자변(自辯)하고자 했던 것이 20세기 근대라는 속물성의 사회에서 기꺼이 인가를 받은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사랑할 가치가 없는 것을 진력을 다해 사랑하고 또 그 실패를 (결과적으로) 수용한 개츠비의 이 '위대함'에는 덧붙일 말이 있을까. 주인공의 '위대함'에 왜인지 모를 자조와 씁쓸함이 새어나오는 것은 역자가 말하듯 통속적인 이미지에 스스로를 복속시키고 파국에 이르는 '이미지'로서의 개츠비의 모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위대한 개츠비도 속물이었던 것.

하지만 이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을 미시마 유키오와 동일선상에 놓을 수 없는 것은(스포미안!^_^) 그는 '내면'이 있는 속물이었다는 점이다. 미국인이 사랑하는 소설에 꾸준히 얼굴을 올리고 있는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는 신흥 국가로 부상하던 미국에 자주 대입되곤 한다. 끝없는 낙관과 개척 정신으로. 그런데 어쩌면 1940년대 후반부터 미국을 지배했던 "고통이나 불행의 변증법적인 힘을 알지 못하며, 오직 그러한 반대항을 경유해야만 '행복'이 가능하다는 것을 모르는 동물"(김홍중)의 정서가 도래하기 바로 직전, 개츠비라는 인물은 라만차의 돈키호테처럼 환상에 속박당할지언정 내면을 잃지 않고 적어도"사랑할 줄 아는" 마지막 주체를 지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바로 비스와바 쉼보르스카가 읊은 저 시의 "이 은판 사진이 탄생하기 전, 아주 오래전에 살았던 그 누군가" 처럼 말이다. 

물론 2년 전 내 꿈에 나타난 그 사람의 이야기 내막을 알 수는 없다. 그 때의 싸이어리에도 적었던 것처럼 사랑 때문에 죽었다는 문장은 지나친 비약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비스와바 쉼보르스카가 말하는 것처럼 '사랑 때문에 죽는 이'를 찾아볼 수 없는 현재 완전한 속물들의 세기에도 여전히 사랑이 그에 준하는 인간의 많은 부분을 흔든다는 점은 수긍할 만하다. 황량한 회의론으로 읽혔던 저 시가 이제는 흔들리는 모든 이들에 대한 위로의 시로 읽힌다. 이 시를 다시 읽으며 바르르 떨면서 이불을 둘러싼 그 사람의 심정을 다시금 이해하면서도, 그래도 사람들은 사랑보다는 감기에 걸려 많이 죽는다는 이 구절들을 그가 행여나 읽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 한 줌의 사랑! 하찮은 지하의 것이자 높은 옥상의 것이기도 한 이것!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잊혀지게 될 것 같다고 그 예전 싸이어리에 썼던 우려와는 달리 나는 다행히도 그 사람의 이름 석자를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23일이면 그 여자의 기일이다. 4월이 끝나도 봄은 늘 잔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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