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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위된 기억



카스테라

저자
박민규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2-03-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무규칙 이종 예술가’ 박민규 첫 소설집 『카스테라』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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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집 『카스테라』 중 단편  「갑을고시원체류기」에 대한 서평



 

‘3.3’. 어느 일간지 입사 시험의 키워드였다. 시험은 키워드를 본 수험자들이 저마다 자유롭게 취재 후 기사를 쓰는 방식이었다. 생뚱맞게 느껴질 수 있는 숫자였지만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언론사 입사 준비생들에게는 꽤 명료한 지칭이었다. 평균 3.3 평방미터의 공간. 고시원이다. 고시원에 고시생만 살지 않게 된 건 이미 오래된 일이다. 여기저기 비정규직을 떠돌며 생계를 이어가는 이들이 고시촌에 기거한다. 아니, 사실 기거라고 표현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고시원은 시급 노동을 끝내고 날마다 일수 도장을 찍듯 자기 삶의 연속성을 확인하며 눈을 잠시 붙이는 공간이다. 집을 구한다는 생각도 사치다. 몸뚱아리 하나 들어갈 수 있는 이 작은 공간은 누군가에게 남겨진 최후의, 유일한 휴식처다.

 

그래서 누구도 고시원에 애정을 가지지 않는다. 누구도 고시원에서 평생을 보내고 싶어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엔 피치 못하게 고시원을 얼른 떠야 한다는 희망마저도 어려워졌다. 서른 줄 근방에 가서야 직장을 구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졌고 자연스럽게 그만큼 그들의 고시원 체류 기간도 늘어났다. 어쩌면 평생을 비정규직으로 살아야하는 세대에게 고시원은, 일종의 생활양식이다. 합판 하나로 분리된 닭장 같은 공간에서 젊은이들은 입을 틀어막고 웃음과 울음을 참는다.

 

박민규의 소설에서 표현된 갑을고시원 역시 이러한 고시원의 특성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 힘들고 피로한 삶, 자신을 도닥일 틈도 없이 하루하루 이어가기도 벅찬 삶을 사는 이들이 여기에 산다. 너절해 보이는 고시원에도 에겐 유품처럼 남은 보물이 있다. ‘는 유일한 재산인 컴퓨터를 보호하기 위해 무진 애쓴다. 그 작은 공간에서도 합판으로 가려진 자신의 공간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투쟁들이 맹렬하다. 두루마리 휴지 같은 생필품에서부터, 늘 분란을 일으켰던 돈 뭉치까지. 변변찮은 삶에서 불신은 더 싹튼다. 힘든 삶을 살아가는 고시원 체류자들이 연대하는 것은 더 쉽지 않았다. 서로의 존재에 대한 경계심은 합판 두께와 반비례했다. 이 경계에는 자기 모멸감이 컸다. 누구든 떠나고 싶어 하는 이곳에서, 휴지를 빌려주는 것 외에 서로에게 할 수 있는 위안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갑을고시원은 좀 더 확장될 수 있다. 누구나 저마다의 갑을고시원을 가지고 있다. 갑을고시원은 자신의 현재를 가장 잘 증빙할 수 있는 인생의 가장 어두웠던 기억의 편린이자 끈덕진 자괴감에 맞서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했던 고통의 공간이다. 박민규는 물론 비관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작중 화자는 갑을고시원을 회상하며 그때의 기억을 어떤 애틋한 마음으로 술회한다. 그러나 이는 회상할 수 있는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다. 고시원을 탈주한 이들에게 그곳에서의 고통스러운 기억은 폐위된다. 그리고 곧 갑을고시원은 자신의 역전반전을 증언할 수 있는 기억들로 포장된다. 고시원의 기억을 애틋해할수 있는 이들의 목소리에서 과거와의 단절 충동을 더 크게 느끼는 것은 과도한 해석일까. 가장 어두운 시절, 가장 위안이 필요한 시절, 가장 연대가 필요한 시절, 아이러니하게 우리는 더 고독한 삶을 택한다. 1평의 쪽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홀로 죽는다. 그 아연한 삶에서 벗어났다고,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을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이 애틋함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 비관을 말하지 않는 박민규의 소설에서 오히려 더 비관이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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