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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누가 그 시간에 대해 묻거든


2015 <여기자> 책 기고


 깨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걸 들키는 건 창피하다. 전화가 울리며 어디선가 나를 찾는 선배의 이름이 뜨면 본능적으로 최대한 사람들이 없는 곳을 찾아 냅다 뛰었다. 전화는 세 번 울리기 전에 받아야 한다. 그렇게 번개처럼 뛰어 들어간 곳에서 웅크린 채 선배들에게 무의식의 저변까지 ‘스캔’ 당하는 기분으로 한참동안 통화를 마치고 나면, 정작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몰라 길을 헤맸다. 한가득 다른 과제를 짊어지고, 더할 나위 없는 자괴감을 느끼며 터덜터덜 전화를 받고 돌아오는 길엔, 민원인 대기실 의자에 반쯤 몸을 걸치고 피곤함이 묻어 있는 표정으로 씁쓸한 미소를 지은 같은 처지의 동기들을 볼 수 있었다.


 긴 겨울이었지만 짧은 6개월이었다. 반년이 생각보다 빨리 흘렀다. 두 시간 단위의 정시 보고를 거듭하다보면 어느덧 해가 졌다(혹은 다시 해가 떴다). 누가 더 많은 과제를 받았는지, 누가 더 많이 깨졌는지를 재고 따지는 (지금 생각하면 비극적이기 짝이 없는) ‘고난 배틀’은 시간이 빨리 흐르는 걸 도왔다. 시련이 우리의 자랑이었고, 고통이 우리의 힘이었다.



보고, 참을 수 없이 무거운 그 이름


 지난해 11월 셋째 주, 하리꼬미를 시작했다. ‘하리꼬미’를 대체할 수 있을 만한 말이 있을까. 풍찬노숙(風餐露宿) 정도면 될까? 그래도 좀 모자란 것 같다. 우리에게 ‘하리꼬미’는 단지 육체적인 고통만 뜻하는 말은 아니었으니. “하리꼬미를 시작했다”는 말은 곧 삶의 양식이 180도 바뀐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바뀐 삶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필사(必死)의 통과의례를 뜻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함께’ 처하는 것이었다. 잘못을 했다고 혼자만 하리꼬미를 하는 일은 없었다. 그때부터 숙명적인 ‘보고’가 시작됐다.


 보고의 기본은 세 가지였다. 자신의 관할 안에 불이 났는지, 사고는 없었는지 등을 체크하는 소방 보고와 새로운 기사가 떴는지를 확인하는 라인 보고, 그리고 새로 찾은 사건 보고다. 수습기자의 업무 중 단연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주는 건 이 세 번째 과제, 사건 보고였다. 지망생 신분으로 오랫동안 갖고 있었던 ‘기자’라는 이름의 낭만을 몇 겹 벗겨내고 ‘생활인으로서 기자’라는 새로운 개념을 각인했던 것도 이 사건 보고에서였다. 기자는 뉴스를 생산해내야 하는 노동자였다. 새로운 것을 세상에 더하는 일은 결코, 결코 쉽지 않았다. 우락부락한 형사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보고할 만 한 거리를 내놓으라는 닦달은 기본. 세상은 고상하게 대의와 이상을 논하기만 하는 이에게는 ‘뉴스’를 주지 않았다.


 나는 특히 이 ‘보고’에 얽힌 에피소드가 좀 있다. 6개월 동안의 수습 기간을 거치면서 받은 벌 중에 가장 힘겨웠던 것이 이 ‘보고’에 관련된 일이었다. 두 시간 마다 정시 보고는 꼭 해야 했고, 그게 아니라도 들은 것, 파악한 것, 확인한 것을 수시로 보고해야 했다. 어딜 간다면 어딜 간다고, 도착했다면 도착했다고 보고해야 했다. 그러나 무사히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꼭 실수를 했고, 혼날 것들로 넘쳐났다. 말 한 마디에 반성문이 5장씩 추가됐다. 보고가 곧 시련의 원천이자 고통의 시작이었다. 그러다 한번, 극약 처방을 받았다. 여느 때처럼 준엄하게 나를 꾸짖던 선배가 언젠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말. “자, 이제 너는 오늘부터 우리 라인에서 방출이다.”


 그때부터 선배는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다. “정혜경 씨는 앞으로 보고를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분명 고통의 근원이 사라졌는데, 차원이 다른 두려움과 고통이 엄습했다. 두 시간마다의 옥죔이 사라진 대신 더 큰 공허가 찾아왔다. 보고하지 않는 내 생활은 그야말로 무용하기 짝이 없었다.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가 뭔지 제대로 알 수 있었다. 박박 사건을 끌어 모아 전화를 하면 선배는 예의바른 음성으로 “많이 급하신 것 아니면 다음에 통화하죠.”라고 말했다. 가끔 선배가 먼저 전화를 할 때도 있었다. 허겁지겁 전화를 받으면 선배는 말했다. “정혜경 씨, 죄송한데 혹시 바쁘지 않으시면 CCTV 하나 좀 구해줄 수 있어요?” 바쁘고 자시고 할 것이 없었다. 냅다 현장으로 뛰어 갔다.


 온종일 맥이 빠져 있는 내 어깨를 툭툭 쳐 주는 건 경찰서에서 숙식하는 다른 동료들이었다. 구석으로 뛰어 가 잔뜩 깨지고 오는 동기들의 표정이 그렇게 편안해 보일 수가 없었다. 뒤웅박으로 살던 지옥 같은 나흘 동안은 입맛도 없었다. 보고의 은총이 다시 내려졌을 때 “기자의 삶은 그야말로 보고에서 시작해, 보고로 끝난다.”는 몇몇 선배의 말은 이제 뼛속까지 들어와 박혔다.



잊을 수 없는 후각의 기억


 수습 첫 라인은 강남이었다. 두터운 겨울옷을 입고 장어를 먹으러 갔던 그날을 기억한다. 잔뜩 긴장해 폭탄주를 들이켰다. 곧 캡의 눈짓 몇 번에 바로 위 기수 선배들이 우리와 함께 우르르 식당에서 나왔다. “한 번만 말한다. 너는 이제부터 강남라인이다. 강남 라인에는 7개의 경찰서와 6개의 소방서가 있다.” 빨간색 캐리어를 택시에 던져놓은 뒤 어디론가 가긴 했던 것 같은데, 참 이상한 일이지만 그 첫 주의 기억이 없다. 단지 머릿속엔 그때가 ‘인상’으로만 남아있다. 그때 선배는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잠깐 쉬고 있을 땐 어김없이 전화가 왔다. 거짓말은 절대 안 통했다.


 폭발적으로 이야기들이 쏟아지는 시간이었다. 무전취식, 고성방가, 노상방뇨, 쌍방폭행, 음주운전, 전방주시태만. 이른바 ‘면피’ 사건들 하나를 보고하는 데도 공을 들여야 했다. 무슨 술 먹었어, 몇 명이랑 같이 먹었어, 어느 쪽 손으로 몇 대나 때렸어, 둘은 원래 무슨 사이야, 처음엔 누가 밀쳤어. 구멍은 어딘가에서 기어코 뚫렸다. 특히 자살 사건은 전사(前史)에 대한 꼼꼼한 취재가 중요했다. 우리 사회에서 벼랑으로 몰리는 사람들의 이야기엔 분명 모두가 함께 터놓고 머리를 맞대게 하는 요소들이 있었다.


 내가 보고한 사건 중 가장 생각나는 몇 가지도 역시 누군가의 죽음에 얽힌 것이었다. 기사로 연결되지 않았어도 머릿속에 강력하게 각인된 사건들이 몇 있다. 첫 주를 정신없이 흘려보낸 강남라인에서, “변사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동기 한 명과 함께 무작정 현장으로 갔다. 시신은 이미 옮겨졌고 골목길에는 과학수사대원이 썼을 법한 장갑들이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하나 남아있는 것이 있었다. 냄새였다. 심장마비로 숨진 지 20일은 더 된 시신이라 했다. 냄새는 지하 단칸방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부터 조금씩 느껴지다가, 닫힌 문에 난 작은 열쇠 구멍에서 훅 끼쳐왔다. 입고 있던 파카에 그 냄새가 배어 며칠을 갔다.


 후각으로 느낀 ‘죽음’은 충격적이었다. 소방대원이나 경찰의 목소리로 듣는 음성으로서의 죽음과 기사나 보고서로 볼 수 있는 텍스트로서의 죽음과는 질이 달랐다. 열쇠 구멍 사이로 먹고, 자고, 치열하게 숨 쉬며 살아가고, 심장이 뛰었을 누군가의 삶이 훅 끼쳐왔다. 작은 창문을 두드려 재봉틀을 돌리고 있던 옆집 이웃의 이야기를 들었다. 30대 중반의 나이. 당구장이며 슈퍼며 곳곳에 뿌려진 그이의 흔적을 자박자박 따라가며, 경찰서에 찾아온 먼 친척들을 붙잡고 명문대 출신의 그가 압구정동에서 작은 술집을 운영하며 점점 살던 집의 평수를 줄여갔다는 그런 이야기들을 모으며 어느새 나는 그의 삶의 퍼즐들을 끼워 맞추고 있었다.


 무서운 일이었다. 나는 어느새 그가 나온 대학과 전공, 그가 특별히 공부를 잘했던 과목, 몇 년 간 찾았던 단골 술집, 동호회, 좋아했던 노래, 어머니와 언제 연락을 끊기 시작했는지, 꿈이 뭐였는지, 그리고 그가 언제 어떻게 좌절했는지까지 알게 되었다. “변사가 있다”는 가느다란 정보로 연결된 내가 어느새 내가 한 사람의 인생을 재구성하고 있었다. 뿌듯하다기보다는, 두려웠다. 내가 그런 것들을 파헤치고, 알 만한 자격이 있는지를 한참 고민했다. 내 검정색 파카와 기억 속으로 스며든 그 냄새가 한동안 떠나질 않았다.



누가 그 시간에 대해 묻거든


 회한에 잠긴 눈빛으로 지난 6개월의 모든 1분 1초가 돌아가고 싶은 아름다운 과거였다고 말할 자신은 없다. 시련이었다. 다만 처절하게 깨지고 좌절하고 스스로에 실망하는 그 시련을 겪으면서 현장에서 어떤 딜레마를 겪게 되는지, 팩트를 더 챙기기 위해서 어떤 수고와 노력을 해야 하는지, 나는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를 대강이라도 가늠할 수 있었다.

 

 여전히 수차례 깨질 일투성이에 매일같이 좌충우돌 시행착오를 끼고 사는 막내 기자이지만 그렇다면,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지난 6개월을 “필요한 시련”이었다고 말해도 되는 것일까. 회식 자리에서는 연차에 상관없이 거의 모든 선배들이 수습 시절을 이야기한다. 나의 6개월도 그런 시간이 될 것이다. 돌이켜도, 또 돌이켜도 다 말하지 못한 말줄임표가 기어코 남아버리고 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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