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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무슨 기사를 쓰고 싶니?

내근을 한다고 건널목 자리에 앉아있으면 지나가는 선배들마다 한 마디씩 던질 때가 많다. 

그때마다 나오는 질문은 대개 비슷하다. 넌 어떤 기사를 쓰고 싶니. 어디를 가고 싶었어. 이제 좀 웃네. 할만하냐.

한창 준비하던 때야 무슨 기사를 쓰고 싶니와 어떤 기자가 되고 싶니, 라는 질문에 대답은 5초가 되기 전에 발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요새는 여간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어리석은 지난날 내가 뿌렸던 대답의 씨앗들을 돌이키면..(^^) 


어느 부서건 어떤 기사를 쓰건 기자에게 요구되는 애티튜드는 대체로 비슷하다. 물론 매체별로 조금씩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수습을 거치고 숨 쉴 틈도 없이 깨지면서 내가 분명하게 하나 깨달은 것은, 무언가를 각잡고 하는 것, 그러니까 수험생 시절 공부를 한답시고 책상을 닦고 의자를 정돈하고 책장을 갈아엎고 등등 요컨대 본식을 위한 예비식을 과감하게 버려야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생각이나 일이라는 건 각잡고 앉아서만 해서는 영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길을 걸어가거나 택시를 타거나 밥을 먹으면서도 노트북을 펼칠 태세가 돼야 하고 급하게 어디로 이동하는 중이라도 기사 야마를 끊임없이 되뇌거나 머릿속에서 기사를 써야 한다. 순발력, 평정심 그리고 절로 몸에 배인 예의와 절도,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해주는 저 위대한 칸트가 말한 카테고라이징이야말로 적어도 지금 시점에 내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다. 


기사와 아이템은 늘 숙젯거리고 심한 압박이지만 그래도 가끔씩 선배들의 훌륭한 리포트를 볼 때면 가슴이 뛴다. 가령 어제 얘기했던 어떤 선배의 리포트는 현장 기자의 감각과 연출력, 그리고 데스크의 훌륭한 메시징이 잘 어우러진 방송 뉴스에 특화된 기사였다. 복잡하고 다양한 논점들이 얼마든지 파생할 수 있는 이슈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그리고 가장 압축적으로 사건의 본질과 사이즈를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아마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일터. 그런 점에서 선배가 매칭한 분홍 셔츠마저 훈훈한, 그야말로 훈훈한 리포트였다 하겠다. 뻔한 방식을 반드시 피하고 가능한한 누군가에게 더 보탬이 될 수 있는 정보가 무엇인지를 선별하고 취재하는 것, 그래서 어느 가느다란 '쨍함'이 선덕선덕 드러나게 하는 일을 1분 30초 안에 구현해내는 것. 이런 일에 능한 이들이 곁에 두고 지켜볼 수 있는 선배라는 건 큰 행운이다. 물론 여전히 신문에 가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지울 수 없지...(그만하자)


하루에 챙기고 신경을 쏟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보니 다음날만 되어도 어제 무슨 일을 했는지 번뜩 안 떠오르는 때가 있다. 새벽에 일어나 이것저것을 챙겨 출근하고, 아침을 먹고 몇몇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정신없이 하루가 간다. 그림을 게더링하고, 어려운 관문들을 퀘스트 깨듯이 여러 개 격파하고, 돌아와 쓰고, 읽고, 편집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정신을 또렷이 차리고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이 '큰 줄기'를 볼 수 있는 안목과 무엇보다! 열정! 이 필요한 것이다. 꼰대같음에 대한 철학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결코 내가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라는 확신!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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