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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긴 연휴의 끝

동생은 좀 더 자라있었다. 언제 말이나 제대로 할까 했던 꼬마가 이제 제법 대화도 하고 본인 의사표현도 분명히 한다. 키도 컸다. 기분 탓인지 누나에 대한 애정도도 한층 높아진 것 같다. 여전히 무더운 산책로에서 새끼 손가락 하나 걸고 나란히 걸으면서 얼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가족사에 길이 남을 대규모 가족 동원 <관상> 관람 이벤트를 마치고 난 이후였던지 내 관상에 대해 계속 종알종알 떠들었다. 


누나는 눈이 너무 커서 이상해, 누나는 턱이 뾰족해서 이상해

왼통 내 얼굴의 이상함에 대해 늘어놓던 동생은 곧 내가 떠나고 난 후 자기에게 여전히 남아있을 휴일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를 골몰하기 시작했다. "내일은 뭐하지?"  꽤나 골똘하게 저에게 허용된 긴긴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는 모습이 웃겼다. 어린애 하나가 역동적으로 시간을 보내기에 3일은 몹시 긴 시간이다. 결국 동생은 십년 넘게 단련해 온 어거지 협상 능력을 발휘해 엄마에게 새 레고를 사주마 약속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동생은 아마 작은 손으로 동당동당 레고를 만지며 남은 휴일을 보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좀 더 늙으셨다. 염색을 중단하고 자라난 무성한 백발 머리를 하곤 아픈 허리에 손을 짚고 계셨다. 전날엔 별말씀 없으시더니 영화 보러 갈 때가 되어서 한사코 가지 않겠다고 손을 내저으셨다. 한 줄을 모두 우르르 차지하고서 영화를 보는데 빈 자리 한 칸이 자꾸 곁눈에 들어왔다. 엄마는 조용히 내게 늘상 가곤 했던 제사를 가지 않으신 것 때문에 마음이 쓰여서 그러신가보다, 라 말했다. 


하루가 늘 일찍 시작되는 우리 할아버지에게 길었던 이번 연휴 역시 평소와 다름없었다. 서늘한 새벽녘 일어나 챙이 있는 모자를 쓰고 산책을 나선다. 아파트를 지나, 갈비집을 지나, 향교를 지나, 대학교 후문을 지나, 동네를 긴 바퀴로 휘휘 돌고 오면 금세 해가 중천에 떠있다. 밥 먹고, 몇몇 전화를 받고, 아직 정정한 친구들에게 넉살 가득한 문자를 몇 통 보내고, 가족들과 텔레비전을 보면 금세 또 저녁이 될 것이다. 이러다 보면 휴일도 금세 흘러가버릴 것이다. 칠십평생 꾸준히 다져온 무던한 일상과 감각 앞에서 일분일초의 역동성이 뭐그리 대수일까. 곁에서 텔레비전 뉴스를 보는 할아버지의 조용한 콧바람 속에 둔탁한 시간이 밀려들었다, 나왔다 했다. 


한 집안에 공존하는 두 시계는 톱니바퀴처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결코 공속할 수 없는 시간관과 삶에 대한 태도를 견지한 두 사람이 더없이 서로에게 잘 스며들게 하는 매질은 바로 삶이 우리에게 허용한 동일한 성분의 슬픔을 자양분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덤덤하게 곧 역사가 되어버리는 순간들. 그 한없는 찰나들을 공유하는 모든 이들의 동일한 슬픔. 


버르장머리 없는 애교를 전공한 내 동생은 까르르 웃으며 할아버지의 맨들맨들한 정수리를 탁, 치고 도망가고 할아버지는 웃음기 어린 버럭, 고함을 지르며 이노무 시키를 보았나 하고 동생을 쳐다봤다. 각기 다른 시대들이 완벽하게 교직하는 이 순간을 앞에 두고, 읽을 마음도 없이 다만 무거운 마음에 바리바리 싸들고 왔던 논문이 강바람을 맞아 한 장 한 장 팔랑, 하고 넘어갔다. 


경향신문 일요일자 1면에 실린 사진 하나가 마음이 아프다. 

긴 연휴가 곧 끝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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