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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사생활과 존엄함


" 도덕적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은 이런 유리벽 속의 삶을 긍정하고 투명한 사회를 옹호할 수도 있다. 전통적으로 프라이버시가 부유층만 누릴 수 있었던 특권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고 프라이버시 보호의 강화에서 생길 이익이 주로 권력자와 부자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모든 사람들이 모든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투명한 사회'는 기술적으로만이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정당화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투명한 사회'라고 해도 모든 것이 투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투명해지는 것은 권력자나 부자들을 빼놓은 일반 시민들의 사생활일 것이다. 정보화 시대는 궁극적으로 프라이버시가 소멸하는 시대를 뜻할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법률적 장치로도 기술의 발달이 잠식하고 있는 사적 공간을 다시 넓히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프라이버시의 옹호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무기는 지금으로서는 법률적 장치 뿐이다. 자유의 옹호자라면 입법 투쟁을 통해서라도 프라이버시의 영역을 넓히지 않으면 안 된다. 프라이버시는 가장 밀도 있는 자유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 고종석




각 개인에게 사생활의 영역이 보장돼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사적 영역과 그 자신의 존엄을 등가로 취급하고 있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자유'에 대해 먼저 생각해야 한다. 사생활의 영역은 개인의 자유가 최대한으로 보장되는 곳, 어떤 외부적 위협과 간섭 없이 오로지 자기 자신과만 관계할 수 있는 곳으로 정의될 수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를 정의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고종석 같은 논자는 인간의 자유 개념이 기술 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폭발적으로 확대/생산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동 시간을 단축해주는 바퀴의 발명, 여성들의 노동을 경감하는 데 기여한 각종 가전 기기의 발달 등 사람들이 소비할 수 있는 잉여 시간이 늘어날 수록 자유가 늘어났다. 이렇게 보면 자유의 본질은 생존에 투여되지 않는 힘과 시간이다. 즉, 잉여다.  


바우만 같은 사람이 '고독권'을 부르짖는 지금에 와서 우리는 사생활을 새롭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최근의 기술 문명이 인간의 자유를 말살하고 있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막대한 양의 '빅데이터'를 바탕으로 전세계를 대상으로 한 거대한 감시 체계를 만들었던 미국의 프리즘이나 골목마다 설치된 CCTV가 대표적 사례로 자주 오르내린다. 그러나 과연 소위 디지털 기술이라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일방적으로 우리 개개인의 정보를 갈취하고 있는가? 그건 아닌 것 같다.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전세계인이 SNS 활동을 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학교가는 길, 식당에서 주문한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별달리 할 것이 없는 잉여 시간을 활용해 사람들은 핸드폰에 머리를 처박고 자신의 정보를 기꺼이 다중에게 내보이곤 한다. 때로는 소통, 때로는 배설이라는 이름으로 SNS 매판대에 쏟아져나오는 견해와 행적들은 '좋아요' 내지는 '리트윗' 버튼과 함께 일시적으로 고독감과 자존감을 맞교환한다. '자아'만의 공간으로 기능했던 사생활은 곧 축소된다. 대신 개인들이 스스로 원하는 '환상-사생활'(학술적 용어 아님)이 그 자리를 채운다. 하지만 이러한 환상-사생활을 진정 자아가 자유로울 수 있는 사생활 영역이라 지칭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더 많이 드러내고, 더 많이 조작할수록 더 많이 스스로 자유의 공간을 말살하고 있는 셈이다. 드러내고 싶은 욕구와 지키고 싶은 욕구가 충돌하는 지점. 이 지점에서 자유의지는 과연 속박당해 있는가, 풀려나 있는가? 


(이러한 모순을 간파해서인지 니체는 일찍이 자유의지를 개소리라 천명하였다. 그에게 자유의지란 사람들에게 도덕적 부담감만 잔뜩 씌우는 실체없고, 악독한, 저주스런 것에 불과했다. 모든 오류와 실패를 자신의 짐으로 전락시키는 야멸차고 비정한 것이었다.)


사생활 침해로 분개하는 경우는 대부분이 그들의 치부가 드러났을 때, 즉 폭로된 사실이 팩트일 때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타인에게 나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을 방해하는 공작. 사생활 침해에 대한 혐오와 분노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내 환상을 깨뜨리지 마!" 

사생활 보호의 당위성, 즉 인간의 존엄함이란 결국 자기가 만들어낸 자기 환상에서 계속 기만되어 있을 권리를 뜻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렇다면 도대체가 사생활이라는 게 존재하긴 하는 것일까하는 의문도 드는 것이 현실이다. 자신의 모습을 비출 수 있는 '타자'라는 존재가 사생활에 항상 선행하는 한 '진정한 자유가 실현되는 공간'으로서의 사생활은 없는 것이나 진배없다. 


이번 채동욱 전 총장의 혼외자 사태가 결국 '팩트' 문제로 수렴되고 있다는 것도 사생활 종말 시대로 흐르는 일종의 우화같다. 사실이건, 사실이 아니건에 우선했던 '개인의 프라이버시'라는 공고한 벽은 이미 깨어진지 오래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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