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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비분강개의 윤리학

다들 참고 있었다. 고려대 경영학과 학생이 던진 한 물음에 많은 대학생들이 울컥했다. 격렬한 고발이 열거되었던 기존의 자보와는 달랐다. 이상하게 느껴지면서도 이상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이상한 상황에 대한 호소가 짙었다. 청년들은 아팠나보다. 스스로의 이상함을 처음 시인한 학생의 솔직함에 하나 둘 씩 마음 속에 뭉쳐 있었던 것들이 삐져나왔다. 


생활전선의 최첨단에서 기를 쓰고 노력해도 안되는 것이 취업이다. 명문대 지방대 가릴 것 없이 취업 재수생들이 해마다 늘어난다. 지방대의 졸업 유예 비율이 50%를 넘어선다고 한다. 울며 겨자먹기로 학적을 걸쳐놓고 있는 학생들이 그만큼 많다. 이러한 만성적 취업난 속, '을'로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진 대학생들은 점점 무뎌져가고, 또 무뎌져야 함을 느낀다. 바로 생존을 위해서. 


이 와중에 정규 8학기를 채우고도 학적을 걸쳐놓고 있는 대학생들에게 2박 3일간의 동원훈련령이 선포됐다. 형평성을 위해서라 하긴 했지만 그 저변에 있는 '졸업 유예자'에 대한 고까운 시선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소규모 수업의 첫 시간에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저마다의 자기소개와 장래희망을 돌아가면서 얘기할 것을 주문하셨다. 나를 비롯해 15명 남짓이었던 그 수업에서 태반의 학생들이 농반진반으로 장래희망이 '졸업'이라 했다. 졸업 유예자들이야말로 졸업을 간절하게 하고 싶은 사람들이다. 졸업을 위해서 졸업을 유예해야 하는 쓴 심정을 기성세대는 곧잘 이해하지 못한다. 면접장에서 "졸업하고 많이 쉬었어요?"라는 말이 얼마나 바늘같이 들리는지, 결단코 쉴 수 없었지만 '성과'로서 말할 수 없었던 갑갑한 시간들에 대한 변명을 어찌 해야할지 졸업 유예자들은 곤혹스러울 따름이다. 


요즘 노랫말들은 유독 정교한 감정선들을 자랑한다. 때와 장소, 상황에 따라 들어야 할 노래가 정해져 있을 정도로 세밀화돼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노래들을 통해 위로받고 자신의 감정을 재확인한다. 학습되는 감정들은 더 정교해지고 요구되는 감동 마케팅 역시 진화하고 있는데 당장 눈 앞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의 처지는 애써 무시하고 자기 앞길 닦기에 매진해야 한다. 이러니 집단적으로 '이상함'을 느끼는 분열증세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임금에 시달리던 삼성 서비스센터 노동자가 자살했다. 지인에게 "열심히 해"라는 조언을 들었던 자살한 노동자는 "더 이상 어떻게 열심히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한다. 열심히 살면 죽는다는 것을 배우는 시대에 '열심히'라는 미덕의 효력은 이미 끝났다. 빈 미덕의 자리에 '운명론'이 기어오기 시작한다. 정말 열심히 했어, 그런데 떨어졌어. 이번엔 네 운명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렴. 실패의 책임을 개인에게 묻는 것보다 운명이 너를 빗겨갔다는 목소리는 차라리 위안이기도 하다. 자신감이 최대 무기라는 취업 시장에서 취업을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자기 합리화를 유지해야 하는 취준생들에게 이 운명론은 이상한 '합리화'의 도구가 돼버리는 셈이다. 이 이상함들의 향연속에 대학생들은 이윽고 분노를 재발견했다. 


내면의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에 합당한 사유와 행위를 하는 것, 을 윤리의 정의라 한다. 이번 자보 릴레이는 화가 날 때, 답답할 때, 애석할 때, 울고 싶을 때 '참으라'는 현명한 조언에 넌덜너리가 난 대학생들의 일종의 '윤리학'이다. 이 감정선의 동요가 어떻게 정치로 이어질 지는 두고볼 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모든 정치의 시작은 생존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억압된 감정들이 생존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과연 제대로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산다는 것인지에 대한 대답이 향후 귀추의 한 켠을 장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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