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기

다시 추워진 토요일

도서관에서 낡아빠진 김영하 소설집을 빌렸다. 

독자들에게 이렇게 낡아빠지도록 읽힐 수 있는 작가라면 글 쓸 맛이 날 것 같다. 

책 군데군데는 몇 번 째 빌렸는지 모를 어떤 사람의 추임새가 연필로 적혀있었는데 

자기가 재밌다고 생각하는 지점에 줄을 긋고 "ㅋㅋㅋ"를 적거나 하는 식이었다. 직접 코멘트보다는 밑줄이 더 많았다.


추운 나라의 말을 배웠다. 는 표현에 밑줄을 긋고 "ㅋㅋㅋ"를 적어두었던 그는 같은 글씨체로

소설 마지막 장에서 손에 힘을 빼고 스치듯 연필로 

"호출에 비해 다양한 소재를 사용하고 있기는 하였으나 그 깊이에 있어서는 좀 더 얕아지고 산업적으로 변한 것 같다"

며 나름의 일갈을 해놓았다. 


빌린 책에 자신의 감상을 쏟아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우선 연필을 들고 적어도 뭔가를 써내려갈 수 있는 자세로 책을 읽는 사람일거다. 도서관 칸막이 책상에 앉아 소설책을 읽진 않았겠지. 책을 빌려 집에 와서 자기 전 책상 앞에 앉아 책을 펼쳤을 것이다. 5열은 얼마 전까지 가방을 들고 가지 못했으니까. 연필도 들고가기 어려웠겠지. 김영하에 관심이 많아서 이 책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전작을 읽고 품평할 정도면 글쓰기에 열망도 꽤나 있는 사람이다. 밑줄을 쳐놓은 문장들 중에는 따로 적어놓았을 문장들도 많을 것이다. 옮겨적을 수첩을 내내 지참하고 다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문장에 욕심이 있는 사람이면 읽고 싶은 책들이 늘 많겠지. 그렇다면 가방은 좀 무겁겠고.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읽는 것이 새 책보다 조금 더 진한 경험일 때가 있다. 꾸깃꾸깃 책을 구겨놓았거나 차를 쏟았거나 하는 경우는 불쾌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이 책을 쓸어내렸을 형체 없는 다수의 손길을 떠올리며 책장을 넘기다보면 

여럿이서 책을 함께 읽는 듯한 감상에 잠길 때도 있다. 이해되지 않는 문장에 줄을 그어놓은 누군가를 비웃기도 하고. 괜히 줄을 쳐놓은 문장을 다시 읽으면서 좋은 문장인 것 같다는 생각도 다시 하게 된다. 



다시 나라 어딘가에는 눈이 온 4월의 토요일. 집에선 영화 <디아워스>를 다시 봤다. 어떻게든 1년에 한 번은 보게 되는 영화다. 

권태에 찌들린 메릴 스트립의 연기에 감탄했다. 벌써 오늘은 일요일이고 내일은 월요일 다시 신문이 나오는 날이다. 스터디하는 사람들은 출석 우수자에게 몰아주기로 한 벌금을 한 달이 아니라 일주일 단위로 하자고 앞다퉈 제안을 했다고 한다. 모두가 그러자고 동의하는 분위기라 나도 상관없다 했다. 여하간 돈이 생활을 강제하는 세상이다. 나도 다를 바 없긴 하다. 내일 또 과제할 책을 구하러 서점 순례를 떠나기로 했다.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월호 침몰 사건 단상  (0) 2014.04.17
만남들  (0) 2014.04.11
엄마한테 잘하자  (2) 2014.04.05
박문각 시사상식과 박민규 사이  (0) 2014.03.23
24시간이 모자라  (0) 2014.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