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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세월호 침몰 사건 단상

손으로 일기를 쓰자고 다짐한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뭔가를 쓰고 싶을 때면 꼭 넷북을 펼쳐들게 된다. 

제주도로 향하던 여객선이 침몰했다. 오전 8시 30분경 바다에 잠긴 200명이 넘는 사람들은 여전히 바다에 있다. 내내 울리는 속보 알람들과 방송으로 보이는 가족들의 탄식들 속에서 어이없게도 내가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 그저 현장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갑갑하고 허무하고 마음이 미어졌지만 어이없게도 내가 지금 이 순간 진도에서 현장을 목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가장 참담했다. 초동 구조 작업 미흡과 책임자 엄벌에 대해 트위터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비난을 퍼붓고 있다. 보험금 수령 액수를 보도했던 mbc도 cnn의 수온에 따른 생존시간 보도와 비교당하며 줄차게 까인다. 


무엇이 문제인가? 두 달 전 결함이 없다고 판정받은 여객선이 암초 지대가 아닌 곳(또는 아니라고 발표된 곳)에서 돌연 '꽝' 소리와 함께 기울어져 이내 침몰한 것이? 오전 8시 30분경 물에 잠긴 3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자정이 넘어서도 여전히 물 속에 있다는 것이? 실종자와 희생자 가족들 그리고 구조자들에게 마이크를 가져다대고 질문을 쏟아내는 카메라들이? 침몰한 배에서 가장 먼저 빠져나온 것으로 확인된 선장과 항해사들이? 초동 구조 과정에서 '가만히 있으라'고 안내했다던 미흡한 승무원들의 대처 방식이? 


억울하고 허망한 죽음들엔 모두가 슬퍼하고 모두가 분노한다. 많은 것이 문제가 될 수 있고 누군가는 죄인으로 밝혀진다. 그러나 그 날선 분노가 폭력이 되는 것 역시 경계해야 한다. 분노를 쏟아낼 문제들을 마구잡이식으로 걸러내는 것도 파시즘의 징후다. 기자들의 취재윤리가 도마에 오르고 있다. 그러나 여론이 앞서 질타하는 '취재 관행' 역시 '전통적인' 딜레마였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무리한 취재 금지'는 다른 한편 기자 스스로의 '취재 검열'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충분히 생각해야 한다. 나는 기자윤리야말로 동기로서의 윤리학이 적용되는 영역이라 생각한다. 본인의 취재 내용과 범위가 알 권리, 공익에 복무할 수 있는 보도라는 자기확신이 곧 기자의 윤리라 생각한다. 따라서 적어도 이러한 자신의 논리에 합당한 질문을 던질 의무는 있다. 


현장기자들에게 '기자윤리'란 다른 차원의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기 쉽다. 기자라는 명찰을 달고 저 현장에 있다면 유족들, 또는 생존자들에게 마이크를 들이대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몇이나 될까. 예의바른 삶을 지향한다면 적어도 기자는 그 목표에서 가장 어긋난 삶을 살기 좋은 직업이다. 긴박한 구조 현장에서 국민의 알권리와 구조 현장의 효율성 사이 언론이 처하게 되는 딜레마는 항상 반복된다. 더 자세히 보도하기 위해 구조자들을 귀찮게 할 것인가, 보도에 앞서 구조에 총력을 기울이게 협조할 것인가. 이 답없고 괴로운 딜레마의 끝에 항상 도달하는 결론이 있다: 기자는 알권리를 위해 취재한다. 알권리는 공익을 위해 필요하다. 공익을 위해서 팩트를 모아 전달하는 일은 필요하다. 취재 범위와 정도는 이 공익보도 준칙에 맞춰 상황에 따라 기자가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 


사실 여론이 질타하는 '무리한 취재'도 기자들이 공익에 헌신할 수 있는 방식 중 하나가 될 여지가 충분하다. 탐문 취재를 통해 경찰이나 보도자료를 취급하는 각종 기관들에서 파악하지 못한 '실체적 진실'을 파악할 때도 있고, 은폐된 사건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다. 때로는 사건의 해결책을 찾기도 한다. 성난 여론을 의식해 스스로의 취재 범위를 좁히다보면 이 또한 기자에게는 '취재 자기검열'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무조건 윤리를 준수하라고 윽박지르는 것은 무리다. 그렇기 때문에 기자 개인의 판단이 중요하다. 통상적인 '인간관계의 예의범절'에서 유연하되 '공익'에 대한 감수성은 민감해야 한다. 허나 단지 '그림이 없다'는 이유로, '타사에 밀리면 안된다'는 이유로 무리하게 취재하는 건 곤란하다. 무리한 취재를 할 때는 이 취재가 꼭 공익에 필요하다는 자기 확신이 요구된다. 어떤 특수한 불법 행위를 저지르지 않는 한, 통상 문제가 되는 '애매한 기자윤리'란 그래서 기자의 자기 정당화를 이르는 말이 아닐까 한다. 해당 취재를 떠났을 때 이건 어떤 논리로 어떻게 공익에 복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빠른 머릿속 알고리즘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더 공부하고 더 준비해야 한다. 이번 종편 앵커 사건의 경우에도 인터뷰 기회를 얻게 된 기자의 즉흥적인 만용이 불러온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좀 더 세심하지 못했다는 비판은 있을 수 있지만 기자의 인간성 운운하는 건 좀 심하다. 세심하려면 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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