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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만남들


한량 생활을 하면서 가장 좋은 것은 어디든 마음대로 가고 누구든 만나면서 '공부'의 명목을 붙일 수 있다는 점이다. 

신문을 줄치며 읽는 것도, 원고지에 글을 박박 쓰는 것도 질리던 차였다. 어딘가 나갈 좋은 계기가 필요했는데 오늘은 두루 좋은 날이었다. 점심 때는 인턴 동기들과 우리를 총괄했던 분과의 식사 약속이 있었고 오후에는 재미있는 글을 쓰는 논설위원의 강연과 뒤풀이가 있었다. 하루를 오롯이 시청역에서 보냈다. 


인턴이 좋은 점이 많다. 식구가 아니라서 느껴지는 거리감이 물론 더 크지만 식구가 아니라서 환대받는 점도 분명 있다. 우리는 오늘도 '꿈'을 팔아 선배들에게 어색한 인사를 쥐어드렸다. 사회생활은 많은 것들을 거래해야 하는 힘든 일이다. 반가움으로 포장한 절박함이 오늘도 동기들의 얼굴을 덮었다. 생존을 위해 잊혀져선 안되는 사람들은 머쓱함 정도는 감내해야 한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버린 우리는 이제 이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다. 어느 정도 모멸적인 이 순간들을 웃는 낯으로 극복해가야 한다는 것. 주변에 있는 이들의 그런 모습들을 마냥 눈살을 찌푸리고 바라볼 필요는 없다는 것. 


논설위원과의 만남도 흥미로웠다. 여기서도 절박한 한 무리의 청년들을 만났다. 글쓰기에 대한 재미있는 팁들을 알려줬다. 권 위원이 글을 쓰는 방식과 글에 대한 관심이 나와 매우 유사해서 놀랐다. 가끔씩 서점 매대에 올라온 책 제목들을 훑는다는 얘기나 감정과 인상에서부터 글의 구상이 시작된다는 점. 문장 단위로 생각해 이것저것 끄적여 놓다가 마감에 이르러 글을 뒤집고 칼럼의 호흡을 결정하는 것. 각 단계마다 어떤 생각을 했을지 문득 분명히 알 것 같아 강의를 들으면서도 웃음이 슬그머니 새나왔다. 나와 비슷한 습관을 공유하는 어른이 있다는 것은 흥미롭고 설레는 일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하찮지 않다는 것을 증언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산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애쓰고 자신이 조금이나마 무엇인가를 변화시키고 자극하기를 바란다. 성취에 집착한다. 생산에 골몰한다. '더 나은' 삶이라 확신하기 위해 자위하며 산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왜 내가 편의점에서 1500원짜리 카스테라를 먹는 노인보다 두 배나 더 비싼 3000원짜리 도시락을 먹을 수 있는지 떠올릴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자괴한다. 맥도날드 입구에 쪼그리고 앉아 콜라에 빨대를 꽂고 마시고 있는 까만 노인이 못 먹는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왜 나는 먹을 수 있는가? 불편한 마음을 눈에 담고 오면서도 꾸역꾸역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먹고 맥도날드에서 1500원짜리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정작 글쓰기에 만족할 만한 성취를 이루지도 못했으면서 글쓰는 사람들의 맨들맨들한 손은 어딘가 부끄러워하는 게 좀 우습기도하다. 어제는 '청년'이라는 자격 덕택에 동기들과 들어갔다 비싼 메뉴를 보고 도로 나온 술집에서 마음껏 안주와 맥주를 시켜 먹을 수 있었다. 불편한 마음, 부당함에 대한 감수성, 화낼 수 있는 능력. 어쩐지 여러가지 자격을 누릴 수 있는 대가는 '괴로워 할 의무'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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