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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어떤 조사(弔詞)


최신 기기 사용계 얼리 어답터류의 중간층을 담당하고 있는 나에게 올해 초는 기억될 만한 시기다. 드디어 오랜 '나에게 보내기' 메일 사용 지상주의를 탈피해 USB를 구매하는 데 성공했다. 생애 첫 USB 구매를 앞두고 내 전화를 받았던 한 공대 친구는 한심하다는 목소리로 어디 가면 다 공짜로 주는 건데 너 지금 뭐하는 거냐는 심드렁한 핀잔을 주기도 했지만, 엄지손가락 만한 빨간색 USB가 내 손 안으로 들어온 순간 최첨단 주류 사회에 진입한 듯한 쾌감을 막을 수는 없었다. USB에 대한 신뢰는 각별했다. 깜찍하게 생긴 이 작은 부속품이 내 동선의 상당 부분에 효율성을 더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기특했다. USB는 현대 대학생의 가장 큰 고민이라 할 수 있는 과제물 인쇄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일분 일초가 아쉬운 제출 직전에 프린트를 위해 CP에서 메일 창에 접속해 아이디를 치고, 급한 마음에 연거푸 비밀번호 입력에 실패하는, 으레 낭비했던 알토란 같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제야 나도 수업 시간에 발표같은 걸 할 때 프로젝터로 띄워진 인터넷 창을 통해 내 메일 계정으로 쏟아진 각종 광고글들이나 사적인 메일의 제목들을 학우들에게 노출시키지 않고서도 우아하게 파일을 찾아 열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갓 눈에 보이지 않는 인터넷 서버라는 가상 공간에 머물고 있는 내 소중한 자료들을 온전히 내 손 안에 쥘 수 있다는 것도 새로운 매력이었다. 전자책이 당최 편하지가 않고 종이 신문을 아직까지 열렬히 선호하는 아날로그 세대의 나에게도 어울리는 감수성이었다. 둥당- 하고 하드웨어를 제거해도 좋다는 말풍선이 뜨고 뽀쇽- 빼낼 때의 그 성취감. 그렇게 엄지손가락 크기의 빨간색 USB였던 그 친구는 나와 꽤 오랜 시간을 함께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웬걸. 레포트 마감을 목전에 두고 중전에서 밤샘 작업을 하고난 후 내게 일말의 성취감과 뿌듯함을 안겨 주었던 빨간색 USB가 보이지 않았다. 중전 관리실에 문의했으나 허사였다. 중전 1층 컴퓨터 어드메에 꽂혀져 있던 이것을 누군가가 가로채간 것이든, 밤샘 노동의 대가로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하던 중 어딘가 나도 모르게 떨어뜨린 것이든 이렇게 USB는 내 곁을 영영 떠나갔다. 가방들과 호주머니를 차례로 뒤지는 허망하고 허탈한 시간이 지났다. USB 자체도 아까웠을 뿐더러 그 안에 담긴 내밀한 기록들이 체모를 곤두서게 했다. 차곡차곡 모아온 일기와 글들을... 아무런 보안 장치도 해놓지 않은터라 불순한 누군가가 검은 미소를 띠고 내 기록들을 모조리 읽어볼 장면을 떠올리니 지붕을 뚫을 하이킥을 해야할 참이었다. 

하드웨어의 고질적 병폐를 온전히 경험한 셈이었다. 분실하면, 즉시 소멸된다. 안에 들어있는 자료의 무게에 비해 지나치게 작았던 USB의 크기도 지적을 해야겠다. 이렇게 작아서야. 있을 때야 간편해서 좋기는 했지만 내 비보를 접한 지인들이 "나도 그렇게 5개는 잃어먹었다"고 위로를 해주는 걸 보면 기억 장치의 소형화는 마케팅 전략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다시 '메일 내게보내기 본위의 저장 패러다임'으로 돌아갈 때다. 이상 빨간색 USB에 대한 애도를 마치며 다시 한번 마음 속 깊이 우러나오는 하이킥을 꾹 눌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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