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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건강에 대한 명상


으레 형이상학적 대화 나누기를 좋아하는 내게 진지하게 리액션도 쳐주며 거기다 무려 계도까지 시도하는 사람들이 몇 있다. 그 중에서도 내가 좀 좋아하는 어떤 선배한테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결국 행복으로 시작해서 없다로 끝나는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었는데 그 선배는 예상 밖으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죽음"이라고 답했다.

나는 대개 죽음에서 유발되는 공포와 두려움을 경시했다. 죽음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다고, 그래서 저도 모르게 안전하다는 생각이 무의식 중에 있어서였던가?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철없고 뭘 모르는 생각이었는지. 죽음을 불사한 온갖 낭만적 로만스들과 예의 형이상학적 기질 때문에 죽음을 더욱 더 형상 너머의 형상으로 인지해버린 탓일까. 실체적이고 손에 잡히는 죽음은, 아직 내게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파주의료원 르포 기사 몇 개를 읽었다. 완화병동에서 존엄한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이야기들을 보았다. 기사 자체는 그리 길지 않았으나 짤막한 매 꼭지마다 펼쳐진 삶과 고통 사이의 명확한 경계가 눈 속으로 성큼, 들어왔다. 기자와 여러 환담을 나누던 환자들이 다음날이면 세상을 떴다. 건조한 스트레이트 문장 속에 있는 몇 가지 단어가 그 정도의 무게를 담고 슬픔을 이고 있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존재의 완벽한 배신, 일어나면 없고 돌아보면 사라진, 한 순간의 여지마저 남겨두지 않은 완벽한 소멸 그리고 종말! 죽음! 

그러다 일이 났다. 빈혈이 극심한 어느날, 먹을 거리를 사러 밖에 나갔다가 예전에도 두어번 겪은 적 있는 아찔한 어지럼증을 경험했다. 식은땀이 바짝나고 눈 앞이 캄캄하며 속이 메슥해오는, 그야말로 내 신체의 물질성을 적나라하게 증언하는 느낌을 경험했다. 바닥에 주저앉아 그나마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던 십여분간을 비롯해 집으로 오는 내 눈에만 어두컴컴한 대낮의 풍경은 참 극악스러운 것이었다. 그날은 특히 아침에 발도 삐끗했던터라 몇십여미터를 절뚝이며 걸어가며 내 생애 가장 고약한 한 시퀀스를 연출했다. 가까스로 집에 도착해 철분제를 털어넣고 침대에 누워서야 정신이 들었다. 

건강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건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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