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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냉장고의 배신

아침나절부터 경고받았던 국지성 호우가 지금에야 쏟아진다. 시원한 밤 공기를 가르는 빗소리에 다소 지쳤던 기분이 쓸려가는 느낌이다. 하루종일 아리던 허리도 이제 좀 낫다. 모든 일을 즐겁게 해낼 수 있는 것도 마음을 조종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직관적으로 어려움을 느끼고 회피하려는 마음에게 낙관론을 강제하며 익숙해지도록 길들이면 어찌어찌 무디게 고난을 잘 헤쳐나갈 수 있게 된다.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운치를 더할 생각에 유자차를 마시고 싶었다. 산 지 1년 정도 된 꿀유자 단지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쩍 달라붙은 뚜껑을 힘겹게 돌려 열었는데 새끼 손톱만한 허연 곰팡이가 하나 피어있었다. 냉장고에 들어가는 모든 것은 나를 배신한다. 당근도, 토마토도, 사과도 그랬다. 그리고 물론,  유자차 너 마저.

찬장에 놓인 잎차를 찾으며 다시 한번 냉장고에 대한 내 다짐을 확인한다. 
냉장고와, 냉장고에 들어가는 것들은 모두 나를 배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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