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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재미있는 사건

24살 여자애들은 언제부터인가 급격히 성숙해진다. 기승전연애류로 흔히 귀결되곤 했던 대화가 차츰 무거워지고 콤팩트 파우더 팩트보다 중요한 것이 피부라는 걸 모두가 알게 되는 시점. 학교에서도 이제 노땅 소리를 들으며 13학번에게 "몇 학번이시라구요?"와 같은 리액션과 함께 괴생명체에게나 던질 법한 시선 공격을 간혹 시전받게되는 24살 여자애들은 종종 이 성숙으로의 떠밀림을 어느 순간 어떤 식으로든 체험하게 된다. 

'질릴 만큼' 연애해 본 친구도 어느덧 하나 둘씩 등장한다. 연애 횟수가 얼마이든, 시시했건 찌질했건 진지했건 간에 몇 차례 술을 앞에다 두고 친구들의 연애담을 듣다보면 나름의 관록과 완숙한 연애관이 서서히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교복을 입은 유승호가 아무리 훌륭하고 견해도 어쩐지 '멋지다'보다는 '뿌듯하다'는 형용사가 떠오른다.
또한, 연애에서 결혼으로의 시냅스도 역시 어느새인가 스멀스멀 등장하기 시작한다.

실연과 복학으로 힘들고 외로운, 빠듯한 나날들 속의 나에게 웃음과 위안을 주었던 서민 교수가 새로운 내 이상형의 신기원을 열었다는 것은 흐름상으로 납득 가능했다. 경향 칼럼에서만 보던 그가 언제부터인가 지면에 나타나지 않자 블로그를 찾았다. 매일 밤 잠들기 전에 그가 재치를 버무려 쓴 지난 글들을 읽으며 빵 터지는 것은 내 일상 속 소소한 행복이었다. 그러다 부인 사랑이 지극한 그의 포스트 면면을 살펴보면서 신기원으로서의 이상형은 구체화되는 듯 했다. 언젠가 친구들과 협의해 찾은 내 취향의 경향성, 이과 전공에 청순한 타입의 재미있는 남성에 완벽히 부합하는데다 독서광이고 부인을 이렇게나 지극정성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니. 어느새 24세를 맞이한 나에게 결혼 상대로서의 시냅스가 촉을 세워 포착할 만한 모델이 아니던가.

여느때와 다름 없이 평범한 하루를 서민 교수의 블로그 글로 마무리지으려 했더 어느 날이었다. 
'감사의 인사'라는 별 재미도 없을 것 같은 제목의 글을 스마트폰에 엄지 손가락을 죽죽 밀어가며 읽던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낯익은 주소와 닉네임이 보이는 게 아닌가. 그건 바로 내가 일전에 써두었던 서민 교수 한 칼럼에 대한 리뷰였다. 

내 블로그 글을 캡쳐한 서민 교수 블로그 글의 캡쳐 



알고보니 서민교수는 경향에 쓴 마지막 칼럼이 자기가 생각해도 기절할 만치 잘쓴 글이었으나 생각보다 피드백이 저조해 우울하던 차에 평소 습관대로 네이버에 글 이름을 쳐보고 내 블로그 글을 발견했다는 것. 그리고 다행히 나는 한동안 게을리 읽었던 신문을 그맘때 열심히 읽었고 마침 서민 교수의 칼럼이 재미있어서 블로그에 글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열광하는 사소하지만 그럴듯한 우연과 일치의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간밤에 김연수적 우주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며(우주와 별과 평행우주 뭐 이런 것) 나 역시 뿌듯한 마음을 갖고 잘 수 있었다. 언젠가 제대로 한번 연락할 날이 오지 않을까? 무튼 청탁이든 인터뷰든 하다못해 기생충 병에 걸려서든 그때가 되어 서민 교수에게 전화를 해서 "선생님 제가 바로 그때 그 골드문트입니다"라고 말할 건수가 생겼다. 재미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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