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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꼰대왕(a.k.a.계몽군주)의 변명

미소를 띠고 있지만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는 셀카를 올려놓고 짤막한 한 마디를 첨부한다. “. 눈물이 꼭 슬프다고 나는 것만은 아니잖아요.” 입을 틀어막고 심각한 표정으로 눈물이 그렁한 원숭이의 사진을 올려놓고 덧붙인다. “나란 몽키, 못난 몽키.” 인상을 쓰고 찍은 셀카를 올리며 쓴다. “너의 사랑에 숨이 막혀더 이상은 naver.” 


인터넷을 돌아다니다보면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소위 개그짤들이다. 이 개그들이 저격하는 것은 자의식 과잉과 허세에 대한 조롱에서 오는 웃음이다. SNS가 소통 수단으로 보편화된 현대 대중사회에서는 개인들의 사담이 자발적으로 유통되고, 일상생활이나 내면의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전시된다. 이 개그짤들은 이렇게 등장한 허세 문화에 대한 일침이자 비틀기.


지난해 페이스북에서 열광적인 반응을 얻으며 오프라인 시집을 발간하기도 한 하상욱의 단편시들도 이러한 조롱의 웃음을 반영하고 있다. “끝이 어딜까, 너의 잠재력(치약)”, “잘못된 선택, 뒤늦은 후회(내 앞자리만 안 내림)”처럼 시 어구의 끝에 배치한 제목을 통해 그럴 듯했던 진지한 구문들이 실상 생각지도 못한 가벼운 소재를 다루고 있었다는 깨달음을 주며 쾌감을 선사했다. 이때 느끼는 쾌감은 진중하고, 고매한 기존 주류 문어(文語)들의 범접하기 어려운 위상을 전복하며 획득되는 쾌감이다. 이 단편들은 인생은 한 갑 성냥을 닮았다. 소중하게 다루는 건 어리석고, 소중하게 다루지 않으면 위험하다”, “인생은 나그네의 길과 같이 인생을 주어로 시작하곤 했던 소위 진지 열매를 먹은 듯’ ‘단호박하게’ ‘꼰대질하는 종래 고전적 수사들의 촌스러움을 저격한 양식이었다. 대중들은 진지한 기존의 시 문법의 근엄함을 비웃듯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제목들에 열광했다. 이것 역시 진지한 시구에 대한 통념을 비틀어웃음을 획득한 사례다.


이렇게 허세 비틀기’, ‘시구 비틀기와 같이 적극적으로 조롱의 유머 코드를 전시하고, 웃음을 유도하는 시도는 유희이자 간접적 방식의 비평 활동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허세에 찌든 동시대의 사생활 전시 문화를 비판하고 너무 진지했던 구시대 표현 양식의 근엄함을 발랄하게조롱하는 시도가 네티즌들 사이에서 2, 3차적으로 패러디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는 점이다. 네티즌들은 허세와 근엄함이 뒤섞인 문화를 직접 향유하는 동시에 메타적으로 그것을 이해, 비판하고 나아가 그것을 또 다른 문화로서 2차 향유하고 있다. 이는 기존에 일원적, 자기중심적이고 권위주의적이었던 문화로부터 탈피해 탈권위와 객관적 개체성을 중시하는 디지털 세대의 특성을 반영한다.


한편으로는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이상을 위해 싸우며 동지와 혁명가를 외쳤던 ‘87년 체제의 일괄적인 진정성프레임에 대한 반발로도 해석될 여지도 있다. 진정성을 외치는 목소리는 위선으로 격하되고 피를 들끓게 하는 감정적 구호들은 감성 팔이로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 다시 말해 현재 대중문화의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여러 비틀기적 요소들은 어떤 대상화된 거악에 맞섰던 시대를 벗어나 생활전선에서 각개전투를 벌이고 있는 대중들에 대한 새로운 체제의 필요성을 도정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진정성이 해체된 발랄한 시대에는 심각한 결함이 발생할 위험이 있다. 바로 감정과 감성의 빈곤이다. 빈 자리를 메울 수 있는 모사품들이 등장한다. 많은 것들이 진짜가 아닌 키치가 된다. 연애도 아니면서 연애 관계인 것 같은 이 새로운 문화 코드로 부상하고, ‘귀 파주는 방’, ‘키스방처럼 유사성행위 업체가 도심마다 늘어서 있다. 심지어 감정은 전시하기를 요구하고, 또 요구를 받아들여 전시할 수도 있는 대상으로 전락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 대통령에게 눈물을 요구한 민심이나 마치 만들어진 각본처럼 눈을 뜬지 32초 후 적절한 시점에 디지털 HD시대답게 생생한 화소를 자랑하며 줌인됐던 대통령의 눈물은 슬픔 역시 거래 가능한 유사감정이라는 불편함을 떨치지 못할 정도의 기묘한 삽화였다.


진정성 결핍증에 걸린 디지털 세대는 감성빈곤의 디아스포라가 되고 있는 것일까? 이는 어쩌면 존댓말을 쓰면 씹선비라 비난하고, ‘할아버지 자살 인증사진을 신기한 듯 올리는 일베의 심리를 분석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혹시 모르겠다. ‘발랄함이나 유희도 좋지만 이런 반동적 효과들이 디지털 세대에 ‘엄숙주의근엄함을 새로운 미덕으로 재호출 하게 될지도?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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