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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편지를 쓰고 싶은 호텔

내가 묵고 있는 숙소는 훌륭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처음 들어왔을 때 알싸하게 코를 스치던 특유의 시그니처 향과 정갈하게 깎아놓은 연필이 가장 마음에 든다. 깨끗한 종이와 결을 따라 예쁘게 깎아 놓은 연필을 보니 절로 책상에 의자를 바추 당겨 앉아 편지를 쓰고 싶게 만든다. 만년필을 들고 오지 않은 것이 후회된다. 나는 깨끗한 종이에 서걱서걱, 글자를 쓰는 펜 소리가 좋다. 캐런 앤의 앨범을 틀어 놓았다. C가 추천한 Josh Rouse의 앨범은 도착 첫 날 주구장창 들었고, 지금은 Acoustic cafe의 앨범과 캐런 앤을 번갈아 듣고 있다. 회사 MT 게임 상품으로 받은 블루투스 스피커가 꽤 쓸 만하다. 샤워를 할 때나,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을 때, 쇼파에 기대 책을 읽을 때나 침대에 누워서도 늘 음악을 틀어 두었다. 


J 선배가 옳았다. 나는 이 휴가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제 휴가도 중반부를 향해 치닫고 있고, 점점 더 이 휴가에서 얻어야 할 것들에 조바심이 나기 시작하지만.(내가 해야 할 일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는 것에서부터 알 수 있다.) 나한테 필요한 건 여유와 시간이었다. 어제도 하루종일 호텔 안에 있었다. 선배드에 비스듬히 기대 신형철의 산문과 유디트 헤르만의 단편집을 읽었다. 신형철의 책은 신기하게도 글이 그렇게 많지 않지만 읽는 데에 시간이 꽤 많이 걸린다. 아마도 한 글자 한 글자를 대충 읽지 못하게 평론가가 쏟아부은 애정이 직접 전달되어서인가, 읽는 시간 만큼 노트 패드를 대고 감상이나 발췌할 구문을 적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 


여기에 와서도 일상을 완전히 떠나지는 못하고 있다. 순간순간마다 보도 정보 시스템에 중독증에 걸린 환자처럼 들어가고 있다. 이런 게 직업병이라는 거겠지. 내가 없는 라인에 유독 발생이 많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좋다기 보다는 자꾸 들여다보게 된달까. 어느덧 내가 편혜영의 <저녁의 구애>에나 나올 법한 '일상의 불감증에 걸려 몸이 부서지는 지도 모른 채 달리는 마라토너'가 된 것인지 모르겠다. 사소한 사안이라도 직접 챙기지 못한 것이 어째 부족한 기분에 답답하기도 하고 깔끔치 못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떤 기자가 될 것이냐'(이 구에는 개인의 성취를 넘어서는 어느 정도의 사회적 의미가 담겨 있다. '기자'라는 단어에 덧입힌 의미가 그런 것이다. '기자는 이래야 한다'는 무거운 추가 달린 자문자답을 할 만큼 나는 영글지 않았다.)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더 내 수준에 어울리는 질문 어구, '어떤 인생을 살 것이냐'에 대해 막상 시간이 그리 남지 않게 되었을 때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는 언제라도 납득할 수 있는 뜨거운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다. 단순 살인 사건을 시간차 단독 보도하지 못해 쓰려하기 보다는 어떤 좋은 기사를, 어떤 납득할 수 있는 뿌듯한 기사를 쓸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하도록 하자. 조바심을 내려놓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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