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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분투의 기억, 행복의 기억

뜬금없게도 그런 날이었다. 그간 신문사에서 써왔던 기사들을 죽 훑어보았다. 

2년 반, 이라고 하면 다들 놀랐다. 적지 않은 시간인 것은 나도 잘 알았지만 퇴임 후 시간이 원체 쏜살같이 흘렀나보다. 지나고 나면 할 만했던 기억이라던 선배들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도 참 하나하나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것을 보면, 힘든 만큼 할 만했고 어려웠던 만큼 행복했던 기억이었다. 


한 학기를 버티게 해 주는 재밌는 에피소드들이 세미나 여행의 그 짧은 기간에 모조리 생겨났다는 것도 참 신기했다. 2박 3일이면 2박 3일동안, 1박 2일이면 더 컴팩트하게 말도 안되게 포복절도 했던 일들이 일어나곤 했다. 같이 동고동락했던 몇몇 선배들이 이제 어엿한 사회인으로 수행하고 있다는 것도 뿌듯한 일이다. 하지만 언제 그랬듯, 다시 만나기만 하면 어느덧 신문사 얘기로 종일 수다를 떨게 된다. 파도파도 끝이 없는 화수분같은 내 2년 반의 알토란 같은 기억들. 


썼던 기사를 다시 처음부터 훑어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기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떠올려보는 것도 오랜만. 신문사 동료들을 종종 만나긴 했어도 기사 얘기보다는 사내에서의 재미있었던 일들, 후일담 등이 이야기의 주제가 됐기 때문이다. 치열했던 논박이 벌어진 사설회의나 서로의 고충을 쏟아내곤 했던 데스크회의, 살벌했던 골방회의, 죽자사자 달려들었던 보투 시간이나 하나 둘 씩 미쳐가곤 했던 새벽 2-3시의 편집국 풍경들. 사람들과 부대끼던 그 현장의 시끌벅적, 도란도란한 풍경들 틈새에서 '기사에 대한 기억' 또한 매우 중요한 내 신문사 분투기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호림 박물관에 대장경 전시를 보러가서 큐레이터와 길게 얘기했던 것, 며칠 만에 전공서를 다 읽고 인터뷰를 가야해서 밑줄 쳐 가며 읽었던 외교서적과 준비를 많이 해서 왔다며 놀라던 인터뷰이 교수님의 표정, 서평 기사를 쓰기 위해 읽었던 당혹스러웠던 사드의 엄청난 소설, 멘트 하나를 따기 위해 수십통 전화통을 붙들고 있었던 기억, 금식 중이었으나 너무 정성들여 차려주신 밥상에 혹독한 다이어트가 어이없게도 끝나버렸던 그 박완서 선생님댁의 노란 풍경, 그리고 춥고 춥고 추웠던 퀘벡의 대학교까지. 크레딧으로 남은 내 기억들이 하나하나 정말 생생하다. 한 글자 한 글자 타이핑하던 순간부터 훈 오빠 동석 오빠 태욱 형님한테 삽화를 부탁하던 순간까지. 이리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니. 정말이지 나는 신문사에서 굉장히 행복했음이 틀림없다. 


신문사가 아니면 더 할 수 있었던 것들, 더 체험할 수 있었던 것들, 또 신문사 안에서 겪었던 갖가지 맘고생들, 물론 말할 거리가 많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2년 반 진득하게 붙어있으면서 내가 얻었던 것도 꽤나 컸다. 아니, 정말이지 정말로 컸다. 나는 이 조직과 우리가 만들어낸 신문과 그 시간을 정말로 사랑했던 것 같다. 친구들과의 어설픈 고담준론도, 간사님들께 쏟아놓은 버릇없고 낯뜨거운 직설들도, 익살스러운 동기들과 함께 한 윗기수 뒷담화도 모두 소중한 기억들이다.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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