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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음악 취향 공유에 대한 느슨한 고찰

새벽녘 가끔씩, 쓰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일 때가 있다. 중학생 시절 뻔질나게 들락거렸던 한 공포 소설가의 미니홈피 글에 따르면 새벽 3시~4시는 이승과 저승이 공속하는 시간이라 한다. 멋드러진 필명과 전래 동화를 잔혹 소설로 기가막히게 둔갑시킬 줄 알던 재능 덕에 많은 사람들에게 스타로 추앙받던 그이는 저승의 끼라도 전수받는 것인지 줄창 새벽녘의 이 시간이면 단편들을 써서 게시판에 올려두곤 했다. 나는 맛있는 생선 요리가 된 인어공주, 존속 살해의 아이콘이 된 헨젤과 그레텔 등 충격적이고 강렬한 이미지들을 선사한 그이의 글들을 보며 매번 그 필재나 서사 전복의 솜씨에 감탄하곤 했다. 그때 그 사람의 미니홈피 bgm은 니노 로타의 영화음악들이었다. 자박자박 반전을 향해 흘러가는 필치가 배경음악과 잘 어우러져 문학적 체험을 완성했다. 그중에서도 <태양은 가득히>와 <대부>의 음악은 그 기괴한 문체와 어찌나 잘 어울리던지. 그때부터 나도 미니홈피 bgm 모으기에 공을 들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귀신보다 서류 탈락이 무서운 취업준비생이 되고부터 스스로의 취미와 특기에 관한 특별한 고찰들을 많이 하게 되면서 그 언젠가부터 친한 사람들에게 음악 취향 공유하기를 즐기는 나의 패턴을 발견했다. 나에게 어떤 이들에 대한 높은 애정도는 '좋은 것에 대한 계몽'으로 발현되고 있었다. 특히 음악이 주효했다. 그리고 추천이든, 권유든 강권이든 어떤 식의 계몽이든 음악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은 많은 것들을 시사한다. 


좋아하는 음악이라는 소재는 상당한 정보를 담지하는 것이다. 치밀한 인내를 요구하는 텍스트와는 달리 음악은 공유하기를 원하는 감정의 초장으로 즉시 그를 인도해낼 수 있다. 음악 취향에 대한 공유는 한 마디로, "나는 이러한 감정을 느끼고, 그리하여 이런 사람이며 당신이 이러한 나를 제대로 알고(인정하고) 경험하게 하고 싶다"는 완곡한 표현이 아닐까? 어떻게 보면 그 어떤 프로포즈보다 주도적이고 그 어떤 구애보다 직접적인. 열성적인 음악 취향 공유자들의 목표는 '내 기분을 이해해줘'가 아닌 '내 기분을 너도 느껴줘'일테니. 


특히 소개팅 초반 전선의 고/스톱을 판정할 적절한 기준치로 음악 취향은 톡톡히 그 역할을 할 수 있다. 어떤 감성에 쉽게 취하며, 어디까지 느낄 수 있는지가 연애의 관건이라고도 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친구들과의 소개팅 관련 수다에서도 '어떤 사람이야?'라는 흔한 질문에 상대방의 음악 취향은 답변의 주효한 바로미터로 제공된다. 엠씨더맥스, 땡. 플라워, 땡. 버즈, 땡. 넬, 아ㅋ.. 김동률, 오? 이적, 호? 소란, 올. (예시다 예시) 

이렇게 보면 사랑의 기본적인 전제는 인정 욕구와 동질감, 소유욕이라는 점이 뚜렷한 것 같기도 하다. 함께 느꼈으면 좋겠고, 함께 그 가치를 알았으면 좋겠고, 달리 말해 나아가 제대로 나의 상황을, 나의 가치를 알아줬으면 좋겠다 싶은 흡수-지향적-관계. 그런데 이러한 관계 맺음 방식을 우리는 단호히 '사랑'이라 칭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욕구를, 이러한 행태를, 이러한 경향을? "성관계는 없다"는 말로 사랑에 철의 장막을 쳐놓은 것으로 유명한 라캉은 분명히 음악 취향에 대한 공유욕 역시 심리적 열패감의 발현이라고 얘기할테다. 


누구나 라캉식 사랑을 꿈꾸고 해야할 필요는 없다. 다만 나는 요즘들어 '음악 취향'에 대한 강고함이 많이 풀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경계가 뚜렷한, 다름이 명백한 대상과의 사랑 역시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희미한 인상이 언젠가부터 보인달까. 물론 심오한 사유의 능력자에게만 가능한 고렙의 경지이겠지만. 그간 사랑이라 인정할 수 없었던 무수한 관계들도 '어떤 경지'를 넘은 사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밑바닥의 동질감이 없이도, 결코 죽어도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없'대도 뼛속까지 '다른 상대'일지라도 어쩌면 사랑은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혀 다른 습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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