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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 시간에 대해 묻거든 2015 책 기고 깨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걸 들키는 건 창피하다. 전화가 울리며 어디선가 나를 찾는 선배의 이름이 뜨면 본능적으로 최대한 사람들이 없는 곳을 찾아 냅다 뛰었다. 전화는 세 번 울리기 전에 받아야 한다. 그렇게 번개처럼 뛰어 들어간 곳에서 웅크린 채 선배들에게 무의식의 저변까지 ‘스캔’ 당하는 기분으로 한참동안 통화를 마치고 나면, 정작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몰라 길을 헤맸다. 한가득 다른 과제를 짊어지고, 더할 나위 없는 자괴감을 느끼며 터덜터덜 전화를 받고 돌아오는 길엔, 민원인 대기실 의자에 반쯤 몸을 걸치고 피곤함이 묻어 있는 표정으로 씁쓸한 미소를 지은 같은 처지의 동기들을 볼 수 있었다. 긴 겨울이었지만 짧은 6개월이었다. 반년이 생각보다 빨리 흘렀다. 두 시간 단위의 .. 더보기
무슨 기사를 쓰고 싶니? 내근을 한다고 건널목 자리에 앉아있으면 지나가는 선배들마다 한 마디씩 던질 때가 많다. 그때마다 나오는 질문은 대개 비슷하다. 넌 어떤 기사를 쓰고 싶니. 어디를 가고 싶었어. 이제 좀 웃네. 할만하냐.한창 준비하던 때야 무슨 기사를 쓰고 싶니와 어떤 기자가 되고 싶니, 라는 질문에 대답은 5초가 되기 전에 발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요새는 여간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어리석은 지난날 내가 뿌렸던 대답의 씨앗들을 돌이키면..(^^) 어느 부서건 어떤 기사를 쓰건 기자에게 요구되는 애티튜드는 대체로 비슷하다. 물론 매체별로 조금씩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수습을 거치고 숨 쉴 틈도 없이 깨지면서 내가 분명하게 하나 깨달은 것은, 무언가를 각잡고 하는 것, 그러니까 수험생 시절 공부를 한답시고 책상을 닦고.. 더보기
영화 두 편과 일상 오늘은 친한 동료 둘을 만나고, 좋은 향수를 사고 영화 한 편을 새로 봤다. 샌안드레아스라는 재난 영화였는데 크게 훌륭하지도, 크게 보기 민망할 정도도 아니었다. 흔하디 흔한 재난 영화의 문법을 따르고 있는 영화. 감정선은 둔탁하고, 갈등은 너무 예상 가능했다. 크게 돈 아깝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지만 영화를 보고 집으로 나서는 길이 이상하게 쓸쓸했다. 엄마가 보낸 할아버지 78번째 생일 파티 사진을 봤다. 흰 머리에 전보다 훨씬 야윈 몸을 보니 더 쓸쓸했다. 세상이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를 태워다 주는 택시 운전기사의 뒷모습이 슬프고육교 앞 항상 불이 켜진 24시간 편의점을 보는 것이 슬프고, 그 안에 있는 핏기 없는 아르바이트생의 얼굴이 슬프고 쇼핑백을 거머 쥔 내 손가락이 슬프고,.. 더보기
어느덧 6월 시간이 빨리 흘러 어느덧 6월이 되었다. 그동안 수습을 뗐고, 수많은 술자리를 거쳤고, 입봉을 했다. 블로그에는 여러 차례 들어왔지만 늘 조금씩 일기를 찌그리다 지우기 일쑤였다. 생각이 너무 많은 까닭이라 생각했는데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생각을 하지 않았던 까닭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생활은 그렇게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한 가지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책임감의 강도와 무게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세고, 무거워졌다는 점이다. 달라진 위상에 견주어 별로 달라지지 않은 능력 때문인지 주변 사람들한테 푸념하는 빈도가 잦아졌다. 글을 쓰고 싶다는 발언으로 그렇게 많이 쪼였던 나지만 웃긴 건 6개월 간 그럴듯한 글을 한 편도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쓰기를 자꾸 미루다보면 언젠가 꼭 써야할 .. 더보기
쉽지 않은 나날들 쉽지 않은 날들이 거듭되고 있다. 내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사실 생각을 놓고 다니는 것인지, 생각을 하지 않고 다니는 것인지,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지도 헷갈린다. 평범한 일상을 희구하지 못한지 2개월이 넘었다. 기자에 어울리는 사람들은 분명히 있다. 적어도 기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존 질서에 충분히 순응할 수 있는 인성을 타고나야 한다. 하루 많아도 두시간 남짓 잠을 자고서도 이 생활이 가능한 것은 선배들에 대한 강한 믿음이나 자기 스스로의 확신이 충분해서가 아니라 위력적으로 이 생활에 길들여질 수 있는 사람들이 기자를 하기 때문이다. 하기야 이를 위해서는 이 강력한 상명하복식의 위계질서를 수긍하기 위한 근원적 차원의 설득이 필요하다. 언젠가 도움이 될 것이라든지, 기자가 되기 위.. 더보기
특종에 대한 하 선배의 고언 "내부고발자를 보호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기자가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도 어떤 식으로든 노출되거나 알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자 경험칙이다. 내부고발자 역시 그런 상황을 모를 리 없고, 만약 모른다면 (기자가) 특종 욕심을 내기 이전에 그런 상황을 충분히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내부고발자가 '이후에 벌어질 일들이 예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발을 하겠다'는 결의가 없으면 내부고발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결의는 기자의 설득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대개 사회 정의라는 거창한 목표보다는 개인적인 분노에 의해 피해를 보더라도 이건 밝혀야겠다고 마음먹게 되는 경우가 많고 실제로 신해철 씨 유가족, 박창진 사무장 등도 참다 참다 상대측의 어이없는 행태에 폭발해 언론을 찾는 경.. 더보기
이것은 당신의,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카트 (2014) Cart 8.8감독부지영출연염정아, 문정희, 김영애, 디오, 황정민정보드라마 | 한국 | 104 분 | 2014-11-13 이 영화에는 낭만이 없다. 영화적 각색이 무색할 정도로 핍진한 묘사들이 관객들에게 묵직한 직구를 던진다. 근래 동시대에 대한 가장 적확한 묘사를 담은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카운터파트를 지나치게 악랄하게 묘사하지 않는 것이 진정 이 시대의 많은 비정규직들이 당면한 '거악'이 무엇인지를 간접적으로 지시하고 있다. 작위적인 설정 없이도 우리가 얼마나 드라마틱한 세상을 살고 있는지, 이 영화는 기본을 말한다. 작은 '연대'만이 우리가 유일하게 꿈꿀 수 있는 희망이라는 어쩌면 극도로 디스토피아적인 영화의 결말부는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실현 가능한 유토피아를 시사한다. 더보기
얼굴들 10월을 마무리하자 11월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조금씩 실감이 났다. 새벽 일찍 집을 나서 출입문에 있는 경비 근로자들께 인사드리고, 밤낮없이 환한 회사로 들어간다. 아직 본격적으로 투어는 하지 못했지만 대략적으로 가늠이 된다. 엘레베이터가 서는 층마다의 공기가 다르다. 내 베이스캠프이기 때문도 있겠지만 보도국이 유독 더 침착하고 무거운 느낌이다.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표정도 그렇다. 무언가를 재빨리 생각하는 얼굴들. 그렇게 넓어 보이던 회사가 고작 몇 주 근무했다고 벌써 손에 잡힐 것 같다. 보도제작국을 가로질러, 편집실을 지나면 센터가 나온다. 중요한 길목마다 교대 근무를 서는 경비분들과는 이제 안면이 트일 정도로 눈인사를 했다. 지난주에는 일주일간 사내 교육을 함께 했던 동기들과 관악산 정상에 .. 더보기
10월의 기록 아날로그 다이어리를 선호하는 편이다. 그래서 연초엔 품을 들여 샅샅이 서점을 뒤져 산 노란색 수첩도 있다. 그런데 올 하반기에는 계속 휴대폰 달력을 썼다. 쓸데없는 고집이었다. 스마트폰으로 일정을 확인하니 훨씬 편하다. 10월은 길었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다시 달력을 들여다본다. 하나라도 일정이 기입되지 않은 날이 5일을 넘지 않았다. 어느 날에는 일정 7개가 적혀있는 날도 있다. 나만 그런 건 아니었을 것이다. 팝콘 터지듯 쏟아진 공채들의 틈 사이로 많은 사람들이 거의 매주 있는 시험을 치느라 고생들을 많이 했다. 결국 나는 한 줌의 성과를 그러쥐었지만, 아쉽게 그러지 못한 사람들의 내상은 아마도 클 것이다.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리고 중요한 것은 앞으로가 시작인 시험들 역시 여전히 많다는 .. 더보기
9월 24일자 사설 엄청난 싱크빅이라 읽다가 숨이 막혔다. 논지대로라면 현재 국내 총생산의 4%에 가까운 예산이 사용되는 출산장려금을 다른 곳에 투여해야 한다는 말이다. 출산장려금이 도입된지 길어야 10년도 되지 않았다. 지원 정책이 제대로 효과를 보지 못했다면 정책 효과의 기대치 산정 작업 복기부터 지원 예산의 적절성까지 다각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현실적으로 출산장려금이 출산을 '장려'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했다고 해서 이 '장려'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는 사고는 명백히 심각한 일반화의 오류이자 인과의 오류다. 인구가 국가 존속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라는 것은 꺼내기조차 망설여지는 진부한 사실이다. 출산은 개별 시민이 자발적으로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화, 재생산하겠다는 의지가 투영돼 있다는 점에서 한 국가가 추구해야 할 복.. 더보기